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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명창의 신작판소리 이순신전
  parkdjsscd.jpg(사이즈:4.7KByte)
* 이는 '박동진 판소리 충무공 이순신' 음반(지구레코드 제작 3CD, 2006년 2월 제조 발매, 앞표지 박동진 사진 제공:국악음반박물관) 해설서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박동진 명창의 신작판소리 이순신전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1.명창 박동진

  박동진(朴東鎭:본명)은 1916년 7월 12일(음력, 호적도 동일) 충남 공주시 무릉동 370번지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대전에서 협률사 공연을 보고 판소리에 반해 버렸다. 판소리를 배울 수 있는 길을 수소문하다가 대명창 이동백의 수행고수였던 지동근이 살고 있다는 연기로 향했다.
  지동근이 자신은 소리를 가르칠 수 없다며 청양의 손병두에게 가보라고 하였고 박동진은 손병두를 찾아가 1년 동안 머슴 노릇을 하며 판소리 눈대목들을 배웠다.
  그후 박동진은 남원의 조계행에게 판소리 고법을 익혔고 조학진 적벽가, 정정렬 춘향가, 박지홍 흥보가, 유성준 수궁가, 김창진 심청가를 사사했다고 한다.
  박동진은 조향창극단을 조직한 바 있고 햇님국극단, 우리국악단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1978년부터 3년간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약했다.
  중년 이후 무수히 많은 공연을 하였고 강정자, 김양숙, 이정일 등 여러 제자를 길러내다 2003년 7월 8일 세상을 떠났다.


2.박동진 회고담

  박동진은 28세 무렵에 6,7년간 경주 거부 최순, 최윤 형제의 풍류방에 몸담고 있었다. 최윤은 당시 73세 정도였는데 일찍이 조영감한테 안성토리의 거문고풍류를 사사했고 판소리, 거문고, 바둑, 서화를 좋아했다.
  이동백과 송만갑이 여름에 최윤 집에서 지내곤 했는데 최윤은 송만갑의 소리를 더 높이 쳤다. 이동백은 적벽가를 통성으로 잘 불렀는데 최윤이 평하기를 소리를 잘하긴 하나 소리가 쭉 뻗질 못하는 준무데기 소리라고 했다 한다. 이동백은 김정근, 김세종에게 소리를 배웠는데 김세종은 유식하기는 하나 이론에만 밝고 실제 소리는 잘 못했다 한다.
  가왕 송흥록은 여산 송씨이고 며느리 따라서 함흥 길주에 갔다가 거기에서 타계했으며 송흥록 누이가 김성옥과 혼인했다. 김성옥은 진양조를 창조했고 이걸 송흥록에게 알려줬다 한다. 김성옥은 말년에 학슬풍에 걸려 걷질 못하고 방에 들어 앉았다. 김성옥 작고 후 그를 묘에 묻었는데 그 근처에서 상여소리가 났다는 전설을 박동진이 들은 바 있다고 한다.
  송우룡이 아들 송만갑에게 “날 다려가오~” 하는 춘향가 중 <이별가>를 가르치는데 송만갑이 왜 동편 송판으로만 하느냐 하자 송우룡이 나가라 하여 송만갑은 집에서 쫓겨나 자득했다 한다. 송만갑의 제자 중에는 김일선(여자)이 수제자인데 소리 잘하고 재주가 있었으나 김모씨가 머리 얹히고 데리고 사는 바람에 소리를 작파했다 한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 1940)에 언급되어 있는 강경의 일끗리는 지금 강경의 북동 마을인데 거문고산조 창시자 백락준은 북동 산 동쪽 사람이고 명창 김성옥은 북동 산 서쪽 사람이다. 이는 박동진이 14세 때 이곳에 가서 직접 들은 얘기인데 당시 백락준과 김성옥 모두 세상을 뜨고 없었으며 이 김성옥 고향은 김정근 고향 서천과 가깝다고 한다.
  김정근은 자식이 여럿 있었는데 알려진 이는 김창룡과 김창진이고 이 가운데 김창진은 박동진의 소리 스승이다. 본래 김창룡은 소리 광대이고 아우 김창진은 고수였다. 그래서 형제간이라도 한집에 공연을 가면 대우가 달라서 밥도 따로 먹었으며 이런 데 불만을 품은 김창진이 도망을 가 무량사로 들어가서 10년 소리 독공을 했다. 이때 김창진이 식음을 잊고 소리에만 전념하여 나중엔 뼈만 남고 옷이 다 너덜너덜 해졌다 한다.
  김창진 같이 진양조를 느리게 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하는 걸 ‘삼공잽이 진양’이라고 했다 한다. 박동진은 춘향가 중 <회동 성참판> 대목을 엇중모리가 아니라 엇모리라 한다고 하였다. 박동진 어려서는 이 <회동 성참판>이 없었고 이는 정정렬이 지어낸 것이라 한다.
  정정렬 춘향가 바디엔 엇모리가 둘이 있는데 끝맺음에 나오는 엇모리는 옛부터 내려온 소리라 한다. ‘어질더질’이라는 말은 이러고 저러고 놀아보자라는 뜻이라 한다.
  옛 명창들은 염불장단-엇모리로 단가를 많이 불렀다 한다. 예전엔 심청가 중 <화초타령>을 엇모리로 했다 한다. “화초도 많고 많다~” 하는 사설은 강태홍이 작사한 것이라 한다.
  상궁접이 들어있는 판소리로는 두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정춘풍 제자 박기홍(나주 사람)조의 심청가 중 <범피중류>와 <화초타령>이 바로 그것이다. 진양 2장단이 바로 상궁접인데 6박으로 12박을 치는 것이다. 박동진은 <범피중류>를 송광록이 지었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다고 한다.
  김창진은 김창룡보다 7,8세 연하인데 중고제와 서편제를 섞어서 소리했고 아편을 했기 때문에 김창룡이 서울로 못오게 했다 한다. 박동진은 김창룡의 판소리를 중고제 혹은 동편제라고 말할 수 있다 한다. 김창룡과 김창진 모두 아버지 김정근에게 소리를 배웠다 한다.
  김창룡의 장남 김세준은 박동진보다 30세 정도 연상이고 김창룡의 차남 아들은 탤런트이다. 백점봉은 정정렬 제자로서 중고제와 서편제를 섞어서 소리했으며 방진관과 신방초는 박동진이 잘 모른다고 한다. 명창 신만엽은 거문고산조 명인 신쾌동의 집안 어른이라 한다. 박동진은 같은 충청도 출신인 가야금 명인 심상건과 가까웠다 한다.
  박동진의 증언에 의하면 판소리는 본래 전라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한다. 예전엔 전라도 소리꾼들이 충청도 명창들에게 당해 내질 못했다 한다.
  대표적인 경상도 명창으로는 이선유(진주 사람), 김록주(김해 사람), 이화중선(부산 사람), 박록주(선산 사람), 김초향 김소향 자매(대구 사람), 김추월(대구 사람), 신금홍(대구 사람), 송행란을 꼽을 수 있다 한다. 강소춘은 가야금병창 명인으로서 전북 이리 사람이라 한다.
  방응규와 방진관은 동일 인물이 아니고 방응규는 방만춘의 손자로서 해미 사람이라 한다. 박동진이 어려서 방응규의 소리를 들었는데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나이든 명창들이 그 소리를 고제, 충청도제라고 했다 한다. 이동백은 방응규의 소리를 가리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비방했다 한다. 방응규가 춤 추는 건 박동진이 보지 못했다 한다.
  예전에 <육자배기>로 이름을 떨친 8명창으로는 전재덕(전주 사람), 조진영(수원 사람), 신마산포(마산 사람), 한똑똑(광주 사람), 장판개(순천 사람), 조기섭(남원 사람), 성명 미상, 김정문(남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한다. 이들은 주로 협률사에서 활동했는데 이중 선소리 모개비는 조기섭이었고 이 조기섭은 월북한 명창 조상선과 한 집안 사람이다. 이동백은 이들의 <육자배기> 소리를 듣고 ‘중 창’이라고 낮추어 말했다 한다.
  이동백과 송만갑은 소리 버린다고 <육자배기> 부르는 걸 엄격히 규제했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대명창들이 <육자배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언젠가 박동진이 송만갑의 <육자배기>를 들었는데 기가 막히게 잘 불렀다 한다.
  정춘풍은 공주 사람으로서 양반광대인데 예전에 남에는 신재효, 북에는 정춘풍이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박동진의 적벽가 중 <남병산 축문>이 바로 정춘풍제라고 한다. 정춘풍은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명창으로서 8년간 무당 뒤를 따라다니며 짐방꾼 노릇을 했으며 해금, 가창가사, 시조에도 능했고 판소리는 특히 적벽가를 잘했다 한다.
  명창 김석창은 공주 무릉동에서 100리 넘게 떨어진 진산, 지금의 금산군 사람이고 박동진이 살던 진잠에서도 살았다. 김석창은 춤 명인 김숙자의 종조부이며 아니리 잘하고 풍채도 좋았고 특히 각도 마부, 말, 사투리가 다양하게 나오는 춘향가 중 <신연맞이> 마부타령을 잘했다. 박동진이 부르는 말 사설이 바로 이 김석창제라고 한다. 김석창은 이동백, 송만갑의 대선배이다. 박동진이 이동백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이동백과 김석창 두 명창이 해미읍성에 들어가서 소리를 했는데 사례금으로 김석창은 100냥, 이동백은 15냥을 받게 되어 이동백이 화가 나서 그릇을 깨고 돈을 받지 않았다 한다.
  황호통은 충남 공주읍 소개면 사람으로서 김정근에게 소리를 배웠는데 호통치는 기세로 소리를 잘하여 황호통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선화당에서 소리를 하면 30리 밖까지 들렸고 머슴으로 나무 장사를 했다 한다. 황호통 아들 황운열이 옛날 거부 김갑순 집(공주시 대통다리) 근처에 살았는데 소리는 잘 못했고 키가 작았다 한다.(1995.5.17.15:00~15:30, 1999.8.19.16:50~18:10 박동진 증언)
  충남 공주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이은희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 공주 대통다리에 황씨들이 많이 살았다 한다.(1999.9.2.17:10~17:15 이은희 증언)


3.박동진 이순신전

  박동진은 한국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였고 그 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에도 능했다.
  그리고 그 판소리 다섯바탕 완창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여러 신작 판소리를 짓고 왕성하게 공연, 방송, 음반 취입을 하였다. 변강쇠가,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장끼타령, 옹고집전, 이순신전, 예수전, 팔려간 요셉, 유관순전이 그 대표작이다.
  젊은 시절 주색에 빠져 소리꾼으로선 극히 절망적이었던 박동진에게 끝없는 힘이 되어 준 원천은 바로 6.25 한국전쟁 때 만나 혼인한 그의 아내였다고 수많은 국악인들은 회고한다.
  국립국악원에 몸담고 있던 대명창 강장원이 여자 관계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1962년 그 자리에 박동진이 취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고 부인의 엄청난 내조, 그리고 스스로도 이를 악물고 심신과 소리를 올바로 다듬어 나갔다. 그리하여 1968년부터 판소리 완창 붐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새로운 판소리를 창작 발표하고 인간문화재로 인정받고 판소리의 대명사로 활동하게 된다.
  박동진이 지은 여러 신작 판소리 가운데 이순신전은 그가 1973년에 발표한 대작으로서 그의 출세작이기도 하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히 추앙하던 인물로서 1973년 박동진이 충무공 탄생일(4월 28일)을 기념하여 신작 판소리 이순신전을 처음 공연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관람하였고 그 직후 박동진은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본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이순신전 녹음은 바로 그 무렵에 취입된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박동진의 이순신전 녹음은 다음과 같고 이 중에서 본 음반은 1973년 지구레코드공사에서 제작한 장시간음반(LP)을 재발매한 것이다.

MI12LP-1475~1479(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판소리 忠武公 李舜臣 제1~5집(唱:朴東鎭, 鼓:朴厚性, 監修:鷺山 李殷相)
弘人書院 발행, 地球레코드公社 謹製, 음반번호 없음(5LP 박스물), 1973년 녹음 제작.

MIREEL-0055(기록용 녹음테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A) 300-430.忠武公史(朴東振)

  본 음반에는 박동진이 지은 이순신전 완창 녹음이 담겨있는데 이순신의 탄생, 성장과정부터 노량해전과 순국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 일대기 전반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고수는 당대 판소리 명창이자 창극계 스타로 맹활동한 박후성이 맡았다.
  이 이순신전에서 박동진은 존경스러운 영웅의 위풍당당한 면모와 거북선의 위용을 기품있고 우렁찬 우조로 그려내고 한산대첩, 노량해전과 같은 긴박한 전쟁 장면은 그의 특기인 판소리 적벽가의 <적벽대전> 대목과 같이 호령조 성음, 자진모리 장단 등으로 박진감있게 묘사해 냈다. 그리고 투옥, 순국 같은 대목은 구슬픈 계면조로 구성하여 상황을 적절히 표현해 냈다.
  본 음반은 박동진 명창이 남긴 여러 신작 판소리 녹음 중에서도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고 목을 엄청나게 연마하던 그의 전성기 취입인 만큼 매우 값진 기록물이라 하겠다.


4.이순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 중구 인현동 근방)에서 태어났다.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다. 이순신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이다.
  28세 때 무인 선발 시험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실격하였다.
  그 뒤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후인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다. 그 뒤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했고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냈고 47세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이순신은 적군과 맞서 싸울 전투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승선하였다. 이후 옥포대첩, 노량대첩, 당항포대첩, 한산대첩, 부산포대첩 등의 전쟁을 치루었다.
  1593년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하고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그 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게 된다. 고문과 갖은 모함으로 죽음에 직면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겨우 살아나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거제 칠천양(漆川洋)에서 전멸했고 다시 이순신이 통제사로 기용되었다. 이후 명량대첩, 노량해전을 치루었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이때 왜군을 대파하였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이순신도 사망하였다.
  제3공화국 때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의해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이순신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는 박동진 명창의 신작 판소리 ‘충무공 이순신전’ 외에도 신채호의 ‘이순신전’, 영화 ‘성웅 이순신’(1971년), 영화 ‘천군’(2005년), 드라마 ‘임진왜란’(1972년), ‘불멸의 이순신’(2004~2005년) 등이 있다.
  이순신의 전술과 역량이 가장 잘 표출된 전투로 명량대첩(鳴梁大捷)이 으뜸으로 꼽힌다. 우수영에 있는 명량 해협에서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킨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 왜군의 수는 전함 200여 척에 거함만 55척인 초대형의 함대였는데 불과 2시간만에 명량대첩에서 무려 133척을 잃었다. 이 대해전에서 이순신 함대 12척의 손실은 단 한 척도 없었다.(조선은 13척, 일본 전함은 333척이었다고도 한다.) 일본측이 수만 명(또는 8천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해 이순신측 희생자는 불과 34명 혹은 70명이었다고 전한다.
  배와 무기를 제조하고 군인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농사까지 지어 군량미를 충당해 가면서 거의 개인기로서 극히 적은 숫자의 배와 무기, 군인을 이끌고 싸워 일본 국왕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대군을 전멸시킨 것이다.

200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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