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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이보형 조사·집필의 『판소리 流派』(서울: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92) 41~43쪽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의 한자는 한글로 변환하였고 오자를 수정하였습니다. 컴퓨터 입력/교정/편집:국악음반박물관(http://www.hearkorea.com)
상기 사진 자료:국악음반박물관 수집 자료. 박후성 명창의 사진과 약력이 수록되어 있는 1957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
판소리 명창 박후성
현장 조사·대담 정리/이보형(국악음반박물관 판소리연구회 고문, 한국고음반연구회장)
본명:박금동(朴金童), 예명:박후성(朴厚性)
생년월일:1922년 11월 15일(임술생, 남)
거주:서울시 동대문구 제기1동 122-153
본적:광주시 서구 서동 180
출생지:광주시 서구 서동 180(향교 옆)
박후성은 전남 광주에서 제2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서중학교를 중퇴하였다.
16세 때 광주에서 성원목에게 2년간 흥보가를 배웠다. 성원목은 명창 성창순의 아버지로 전남 화순 동복 사람인데 화순 적벽 출신인 것으로 짐작되며 당시에 광주권번 판소리 사범으로 있었다 한다.
박후성은 18세 때 광주에서 박화섭에게 1년간 춘향가를 배웠다. 박화섭은 박후성의 숙부이며 광주 출신인데 김채만의 제자라 한다. 박후성이 박화섭에게 1년쯤 판소리를 배운 뒤에 박화섭이 경주권번 선생으로 갔기 때문에 박후성도 경주에 따라가서 3개월간 판소리를 배우다가 중단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한다.
박후성은 20세(또는 21세쯤)에 광주에서 박동실에게 3년간 춘향가, 심청가를 배웠고 적벽가는 절반쯤 배웠다 한다. 박동실은 제자의 집에 다니며 가르쳤는데 박후성은 박동실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배웠다.
거문고 명인 박석기가 담양 창평 지실(지곡리) 제각에서 박동실을 불러 여러 젊은이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그때 공기남, 한승호, 박후성 등 여러 제자가 매일 박동실에게 배웠다 한다.
박동실은 제자에게 판소리를 가르칠 때 먼저 사설을 한번 불러주고 나서 직접 소리하고 장단이 떨어지게 하고 두 번째 소리로 시범을 보이고 세 번, 네 번, 다섯 번 복창하도록 하면 가르치는 것은 다 마쳤다고 한다. 박후성은 당시에 소리를 쉽게 익히는 재질이 있어 다른 제자들이 세 번 배워도 못따라갈 분량을 한번에 척척 배워 나갔다고 한다.
박동실은 전북 순창 출신으로 생각되나 분명치 않으며 김채만 선생에게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박종원, 박화섭과 같은 선생의 제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박종원, 박화섭이 김채만 제자이기 때문이다.
또 박후성이 젊어서 박동실과 단체를 만들어 전남 강진에 갔더니 박동실이 어느 여관에 들었는데 그 여관 여주인에게 자기 선생 마나님이시라고 소개하였던 적이 있었다 한다. 그 뒤에 박후성은 강진에 갈 때마다 그 여관에 들려 그 여주인을 만났는데 그 여주인이 김채만의 소실이라 하였다고 한다.
박동실은 5바탕을 다 잘하였고 특히 심청가를 잘하였다 한다. 박동실의 제자에는 박후성, 공기남, 한승호 등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그 당시 선생이 박후성을 첫째로 쳤다고 한다.
박후성은 그 뒤에 가끔 한승호와 광주 송정리에 있는 극락정에 가서 1개월씩 독공을 하였는데 때로는 정통사라는 절에 가서 독공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소리는 선생에게 배운 뒤에 혼자 약 1년간 정독해야 자기 것이 된다고 하며 또 2,3년간 실연해야 재담, 아니리 등이 제대로 소화된다고 한다.
박후성은 전남 담양 비실태 제각에 가서 공대일, 김동준, 주강덕, 김채선 등과 그밖에 여류 명창 3인과 함께 소리 공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소리 복습겸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박후성은 일제 때 화랑창극단 단체를 따라다니며 팔란춘목 망부석 등 여러 창극에 출연하였다 한다. 이 창극 단체는 조상선, 박석기, 김소희와 같은 명창들과 함께 수행하였는데 각 지방을 순회하다가 북선에서 절단났다고 한다.
박후성은 그뒤에 동일창극단에 입단하여 고구려혼(일명 일목장군)이라는 창극에 출연하였는데 이때 조상선, 임소향, 박귀희, 조농옥 등이 출연하였다 한다. 동일창극단을 수행하며 각 지방을 돌았는데 평안도 신의주 공연 때 해방을 맞아 광주로 돌아왔다고 한다.
박후성은 1946년에 광주에서 박동실 국극협단에 입단하여 일목장군, 춘향전 등 창극 공연에 참가하였다 한다. 당시 이 단체에는 박동실, 공기남, 한승호, 박후성, 김봉선, 박보아 등 여러 명창들로 구성되었는데 일목장군에서는 박후성이 장군 역을 하였고 춘향전에서는 박후성이 이몽룡 역을, 김봉선이 성춘향 역을 맡았다가 뒤에 박보아가 맡았다 한다. 김봉선은 이리 출신으로 백남석의 부인이며 박동실에게 배웠으며 지금은 은퇴하여 서울에서 남도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박후성은 6.25 이후에 대동국악사를 6년 이상 경영하며 고구려혼 등 여러 창극을 공연하였다. 그 뒤 여성 창극이 번창하자 여성국극단 화랑을 새로 조직하여 6년 이상 경영하며 청사초롱 등 창극을 공연하였다 한다. 이때 청사초롱에서는 신숙이 주연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여성국극단도 불황을 맞아 대부분의 단체들이 해산하거나 지방 약장사를 꾸며 순회하다가 외국 문물이 범람하자 그것도 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박후성은 일제 때 창극단 다니면 징용을 면제해 준다는 말을 듣고 한일섭, 홍갑수 등과 창극 단체를 따라 일본 순회 공연에 참가하여 30분짜리 연극에 출연하기도 하였고 6.25 동란 때에는 부산에서 김건 소령이 이끄는 해군 부대 국악선무공작대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 단체는 최찬식이 단장, 박후성이 부단장을 역임하였는데 정의총탄이라는 공연물을 구성하여 군대 위문 공연, 피난민 위문 공연 등을 한 바 있다 한다.
박후성은 국립창극단이 1969년에 제3회 고베 카니발에 초청되어 공연할 때 창극단에 입단하여 박옥진, 홍갑수, 김영철 등과 심청전, 춘향전, 흥보전 등을 공연하였다 한다.
국립창극단이 창단된 명동 국립극장 시절에는 고정 단원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창극 공연시마다 출연단을 임시로 구성하여 공연하였던 것인데 지금(1988년)부터 약 8년 전에 정식으로 국립창극단에 고정 단원을 두었다 한다. 박후성은 1982년 3월 1일에 국립창극단 단장에 취임하여 1988년 현재까지 창극단을 이끌어 오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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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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