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 이는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4) 오비취 판소리·가야금병창' 음반(명인기획/엘지미디어 LGM-AK004, 1CD, 1932/1934년 녹음, 1995년 제작, 노재명 기획/고증/해설/사설 채록) 해설서 1~11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 상기 사진 자료: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음반자료 관리번호 MICD-0187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4) 오비취 판소리·가야금병창
엘지미디어(LG소프트) LGM-AK004(1CD), 음반 기획·해설·사설 채록:노재명(해설서 25쪽 수록), 1995년 유성기원반(마스터 동판) 복각 제작. 녹음:1932·1934년.
판소리, 가야금 명인 오비취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1995년 7월 31일, 명창 오비취(吳翡翠)의 딸 박옥희(朴玉姬)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1995년 7월 24일자 『중앙일보』와 1995년 7월 31일자 『조선일보』에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에 대한 기사와 함께 오비취의 이름이 실렸는데, 그 신문기사를 보고 오비취의 딸이 연락을 해온 것이다.
박옥희는 오비취의 생몰연대와 음악 활동에 대해 증언해 주었고 오비취의 사진 22장을 제공해 주었다. 박옥희는 오비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오비취는 1910년 6월 26일(음력), 마산에서, 아버지 오상섭(吳相燮)과 어머니 염자현(廉子玄) 사이에서 1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한다.
오비취의 본명은 오선초(吳仙楚)이며, 오비취의 아버지는 오비취가 아주 어릴 때 작고했고 오비취의 어머니는 오비취가 13세 때(1923년) 작고했다 한다.
조실부모한 오비취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국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한다. 오비취는 판소리 외에도 가야금, 거문고, 아쟁, 북, 장고로도 명인이었다 한다.
오비취는 딸 박옥희에게 국악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박옥희는 어머니 오비취로 부터 국악 학습 내력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다 한다. 그런데 오비취와 친했던 방금선이 오비취의 학습 내력에 대해서 박옥희에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한다. 방금선의 말에 따르면 오비취는 송만갑, 이선유, 박중근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김종기와 정남희에게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한갑득에게 거문고산조를, 남원 사람 정중권에게 국악을 배웠다 한다.
오비취는 1932년 11월 초에 일본으로 가서 콜럼비아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한 일이 있다 한다. 오비취가 1932년에 콜럼비아에서 음반을 취입할 당시 진주에서 살고 있었다 한다. 오비취가 진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간 것은 콜럼비아에서 음반을 내고 유명해진 후라 한다. 오비취가 1932년에 일본 콜럼비아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할 당시, 박옥희(1932년 양력 7월 26일 출생)는 태어난지 백일이 좀 지났을 때였는데 어머니 오비취를 따라 일본 콜럼비아 회사에 갔다 한다.
그리고 오비취가 1937년에 모(某) 음반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한 일이 있다 한다. 오비취가 1937년에 음반을 취입하러 갈 때 박옥희는 따라가지 않았다 한다. 오비취가 1937년에 음반을 취입하고 돌아오는 길에 딸 박옥희에게 줄 장난감을 사왔다 한다.
오비취의 오빠 오영문은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사진관을 경영한 바 있고 1946년에 작고했다 한다. 오비취는 진주 사람 박두안과 혼인하여 슬하에 외동딸 박옥희를 두었다 한다. 오비취의 손녀는 장홍심(한성준 제자)에게 무용을 배운 바 있으며, 손자는 현재 대학 교수라 한다.
오비취는 박록주, 방금선, 조소옥, 장홍심, 김농주, 성추월과 같은 국악인들과 친했다 한다. 오비취는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는 성품이었고 바느질, 요리 등 손재주가 좋았다 한다. 오비취는 과묵한 편이었고 부지런했으며 강직했다 한다. 오비취는 150센티의 키에 몸이 외소한 편이었고 젊어서 고생을 하여 건강이 늘 안좋았다 한다.
박옥희는 오래 전에 집에 가야금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그 가야금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한다. 박옥희는 어머니 오비취가 집에서 판소리나 가야금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한다.
오비취는 이미 20대에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광복 후에는 자손의 장래를 위해서 국악 활동을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했다 한다. 국악을 천시하는 사회 풍조 때문이었다 한다. 오비취가 국악을 했다는 이유로 딸 박옥희가 사회에서 받은 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한다. 오비취는 1984년 손녀 혼인식 때에도 사돈 식구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양가 기념 사진은 끝내 찍지 않았다 한다. 박옥희는 어머니 오비취가 손녀를 혼인시키면서도 얼굴 한번 자신있게 들지 못한 심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한다.
박옥희는 뒤늦게라도 어머니 오비취의 생애와 예술을 올바로 세상에 알리기 위해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 시리즈 제작진에게 연락을 했다 한다. 박옥희는 어머니 오비취에 대한 증언을 마치고 나서, 뒤늦게 나마 어머니 오비취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린 것 같다며 기쁘다 했다.
오비취는 작고하기 몇 해 전부터 젊어서 취입한 유성기음반들을 다시 들어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한다. 오비취는 자신이 일제 때 유성기음반에 취입한 소리들을 다시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다. 박옥희는 요즘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으로 제작된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을 매일 듣다시피 하며 어머니 오비취를 생각한다고 한다.
엘지미디어에서 복각된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에 담긴 오비취의 음성은 제대로 복각된 것이라 하며, 그 이전에 다른 음반회사에서 복각된 오비취의 녹음은 오비취의 본래 음성과 다르게 변질되어 복각되었다 한다.
오비취는 불교 신자였으며 녹번동 보현사에 자주 다녔다 한다. 오비취는 1986년 음력 6월 26일(양력 8월 1일)에 연신내에 있는 모(某) 병원에서 작고했다 한다. 박옥희가 오비취 작고 후 시신을 화장하고 녹번동 보현사에 모셨다 한다.(1995.7.31, 1995.8.30 31,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대림경동아파트 자택에서 박옥희 증언)
오비취에 대한 문헌자료는 매우 드물며, 오비취의 활동 기록은 주로 일제 때의 신문에서 발견되고 있다. 오비취가 광복 후부터 음악 활동을 뜸하게 하다가 1950년대부터는 음악 활동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확인한 오비취에 대한 문헌자료는 다음과 같다.
● 1933년, 오비취의 <박타령>과 <돈타령> 음반(Columbia 40384-A B)이 발매됨을
알리는 콜럼비아의 신문광고에 ‘晋州 吳翡翠’라는 기록이 있다.(1933.1.26.
『매일신보』)
● 1933년, 오비취의 <금수강산>과 <심청이 하직하는 데> 음반(Columbia
40412-A B)이 발매됨을 알리는 콜럼비아의 신문광고에 ‘晋州 吳翡翠’라는 기
록이 있다.(1933.3.27 30 31, 1933.4.1. 『매일신보』)
● 1933년 10월 13∼14일, 조선일보 마산지국 주최로 구미 산수좌에서 고아들을
돕기 위한 명창대회가 열렸는데 송만갑, 박중근, 오비취, 모추월 등의 성원하
에 성공적으로 치루어졌다 한다. 이때 여러 사람들이 고아들을 돕기 위해 의
연금을 냈는데 진주 오비취가 1원을 냈다 한다.(1933.10.14 19. 『조선일보』)
● “吳翡翠: 고향은 전주(全州)이요 방년 二十一세(1914년 출생:필자 주)로 수궁
가(水宮歌)가 특장이다.”(1935.1.25. 『매일신보』)
● 1935년 11월 27∼28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로 관철동 우미관에서 열리는 명
창대회에 오비취가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오태석, 신숙, 조앵무,
조소옥 등과 함께 출연할 것이라 한다.(1935.11.26. 『조선일보』)
● 오케이영화제작소가 제작한 영화 ‘노래 朝鮮’에 오비취가 판소리 명창 임방
울, 신숙, 대중가요 가수 고복수, 이난영, 김해송, 임생원 등과 함께 출연했
다 한다.(1936.4.19. 『조선일보』)
● 1938년 3월 12일부터 2일간 부민관에서 열리는 여류 명창 대회에 오비취가 박
록주, 김초향, 배설향, 임소향, 조소옥, 조농옥, 조금옥, 김류앵 등과 함께
출연할 것이라 한다. 여자들만으로 판소리 명창 대회를 개최한 것은 이 공연
이 처음이라 한다.(1938.3.12. 『조선일보』)
● 오비취는 1911년에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고 송만갑에게 판소리를 배웠다.(김
연수, 『창본 춘향가』 서울:문화재관리국, 1967, 335쪽)
● “오비취는 1918년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오랫동안 진
주 시골에 묻혀 살다가 1988년에 작고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보형, 『콜럼비
아판 춘향전 전집 음반 해설지』 신나라레코드 RO-594, 3LP / SYNCD-013∼014,
2CD, 1990)
● 김애정의 증언에 의하면, 오비취, 박봉선, 임춘앵, 김애정이 1949년 무렵에
박동실에게 단가를 배웠다 한다. 오비취는 김애정의 올캐이며 김애정보다 8세
위(1916년 출생:필자 주)라고 한다. 오비취는 1988년에 작고했다 한다.(이보
형, 『판소리 유파』 서울:문화재관리국, 1992, 192∼193쪽)
● 김소희의 증언에 따르면, 오비취는 판소리뿐 아니라 가야금산조도 잘했다 한
다. 1940년대 후반에 종로구 봉익동의 조양여관에서 오비취, 김소희, 김연수
(女, 金練洙, 1911∼1990?), 방금선, 김윤덕, 박귀희 등이 정남희에게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웠다 한다.
1993년 9월 30일 안비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오비취 씨는 나 안비취와
이름이 같아서 기억에 남는다. 중국에 비취라는 새가 있는데, 하규일 선생님
이 나 안비취에게 예명으로 지어 주셨다. 오비취 씨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박
정희 대통령 시절에 본 적이 있다.”
(노재명,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 음반 해설지』 엘지미디어 LGM-K001, 2CD, 1995, 17쪽)
그 동안 오비취의 생몰연대와 출생지가 학계에 잘못 알려져 있었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오비취의 출생시기는 1911, 1914, 1916, 1918년으로 일치되지 않았고 작고시기는 1988년 무렵일 것으로 추정해 왔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오비취의 딸 박옥희의 증언에 의해, 오비취가 1910년에 태어나 1986년에 작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오비취의 출생지 또한 문헌에는 진주, 대구, 전주라 기록되어 있어 그 동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박옥희의 증언에 의해 오비취가 마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비취의 고향이 마산인데 문헌에 진주, 대구, 전주라 기록되어 있는 것은 오비취가 진주, 대구, 전주 등 여러 지역에서 폭넓은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생겨났다고 하겠다.
그 동안 학계에는 오비취의 스승으로 송만갑, 박동실, 정남희만이 알려졌으나 이번에 박옥희의 증언에 의해 오비취가 송만갑(판소리), 박동실(판소리), 정남희(가야금) 외에도 이선유(판소리), 박중근(판소리), 김종기(가야금), 한갑득(거문고), 정중권(?)에게도 국악을 배운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오비취의 부모(오상섭, 염자현), 본명(오선초), 국악 입문 계기(어려운 가정 형편) 등이 박옥희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었다.
오비취는 조실부모 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돈을 벌어 가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국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다. 박옥희의 증언에 의하면 오비취의 어머니 염자현이 타계한 시기가 1923년이라 하므로, 오비취의 국악 입문 시기는 1923년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비취가 국악에 입문한지 10년도 채 안된 시기인 1932년에 명창으로 인정받고 음반을 취입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오비취의 국악 학습 속도가 남달리 빨랐던 것 같다.
오비취는 1932년 여름에 딸 박옥희를 낳았으므로 1930년 무렵에 혼인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박옥희의 증언에 의하면 오비취가 1932년에 콜럼비아에서 음반을 취입할 당시 진주에서 살고 있었다 한다. 당시 신문을 보아도 ‘진주 오비취’라는 기록이 있다.(1933.1.26. 『매일신보』 / 1933.3.27 30 31, 1933.4.1. 『매일신보』 / 1933.10.14 19. 『조선일보』)
박옥희의 증언에 의하면 오비취가 1932년에 콜럼비아에서 음반을 내고 유명해진 후에 서울로 갔다 하는데, 1934년 무렵에 서울로 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오비취는 동편제 소리를 위주로 학습했다. 1949년 무렵에 오비취가 박동실에게 서편제 소리를 배우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는 송만갑, 이선유, 박중근에게 동편제 소리를 배웠다. 오비취가 꿋꿋하고 우렁찬 동편제 소리를 위주로 학습한 것은 강인하고 곧은 성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오비취가 송만갑, 이선유, 박중근의 동편제 소리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오비취가 진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주는 송만갑, 이선유, 박중근의 주된 활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송만갑이 오비취의 스승이라는 것은 문헌 기록과 박옥희의 증언이 일치되며 오비취의 녹음을 들어보더라도 송만갑제의 특징이 발견되므로, 오비취가 송만갑에게 배운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으며 송만갑제 위주로 학습했다고 생각된다.
오비취는 판소리사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오비취는 5명창의 판소리를 오늘날까지 전해준 박록주, 김여란, 정광수, 김연수, 박초월, 김소희와 같은 세대의 명창이다. 즉, 오비취는 판소리의 전통을 오늘날까지 이어줄 수 있는 명창 가운데 하나였다. 대명창 송만갑의 소리제를 간직했던 오비취는 1986년까지 살았으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가 국악 활동을 그만두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국악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했다면 능히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을 만한 기량을 지녔다. 과연 국악에 대한 사회의 대우가 어떠했기에 대단한 기량을 가진 오비취가 국악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는가?
필자는 오비취의 딸 박옥희가 끊임없이 흘리는 눈물 속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회의 박대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국악인의 후손이라 하여 입학하는 데, 취직하는 데 있어서까지 차별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한다. 지금 상식으로 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고 정말 그런 시대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오비취의 딸 박옥희와 대담을 마친 후 몇 시간 지나서 박옥희로 부터 또다시 전화가 왔다. 오비취의 손자, 손녀 이름은 절대로 공개하면 안된다는 말을 한번 더 강조하는 전화였다. 박옥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오비취)가 손녀 혼인식에서도 양가의 단체 사진을 찍지 않은 그 마음 아시겠죠? 후손을 위해서였습니다. 내(박옥희) 이름은 알려져도 괜찮지만 손자, 손녀 이름은 공개하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박옥희에게 오비취의 스승이 누구인지 말해준 방금선은 오비취와 친했기 때문에 오비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방금선을 만날 수 없었고 전화 통화 조차 할 수 없었다. 방금선 또한 오비취처럼 묻혀 지내는 이유가 후손을 위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겪은 사회의 박대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박옥희는 어머니 오비취와 가까웠던 방금선에게 안부 전화를 자주한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박옥희를 통해 방금선에게 궁금한 것을 묻고 전해 받는 식으로 오비취에 대해 궁금한 점을 알 수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미소를 보내는 태양이 원망스럽듯이, 온갖 수모를 겪고 살아온 국악인들에게는 어떠한 격려와 위로의 말도 얄밉게 들릴지 모른다. 그래서 필자는 눈물을 흘리는 오비취의 딸 박옥희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국악에 대한 사회의 냉대로 인해 송만갑의 아들 송기덕은 공력들인 판소리를 그만두고 순사의 길을 택했다. 송만갑의 수제자 장판개, 박봉래, 김정문과 김창환의 아들 김봉학, 김창환의 수제자 오수암을 비롯해서 김록주, 이화중선, 배설향 등 5명창의 뒤를 이을 수많은 명창들이 요절했다. 일제 때 급격히 확산된 아편이 국악인들의 주된 사망 원인이었다. 그리고 6.25로 인해 많은 명창들이 목숨을 잃었고 김채만의 수제자 박동실을 비롯해서 조상선, 임소향 등은 월북했다. 요절하거나 월북한 명창을 제외하면 1950년대 이 땅에 남은 명창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몇 명 남지 않은 명창들 중에서도 김초향, 오비취, 이소향, 방금선, 조소옥 등은 사회의 국악 천시 풍조 때문에 국악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이리하여 판소리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서 뒤늦게 판소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생겨났고 1964년에 박록주, 김여란, 정광수, 김연수, 박초월, 김소희가 판소리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김초향, 오비취와 같은 명창들도 능히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을 만한 기량을 가졌으나 국악 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에 묻혀 지냈다.
박옥희의 증언에 의하면 오비취의 오빠 오영문은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하는데 오비취 집안이 본래 음악적 재질이 있었던 것 같다. 오비취는 뛰어난 미모와 고운 목을 타고 났으며 애원성 있는 소리에 단단한 공력까지 겸하여 일제 때 인기가 대단했다. 일제 때 오비취는 그 인기를 등에 업고 음반 취입, 공연, 방송, 영화 출연을 활발하게 했다.
다음은 오비취가 콜럼비아, 오케이, 빅타 음반회사에서 단가, 판소리, 창극, 가야금병창, 민요, 가야금 반주, 장고 반주를 취입한 음반들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오비취 음반의 전목록이다.
[콜럼비아 1932년 녹음]
Columbia 40384-A(21622)
興甫傳 박타령 吳翡翠 鼓韓成俊
Columbia 40384-B(21623)
興甫傳 돈타령 吳翡翠 鼓韓成俊
Columbia 40393-A
雜歌 흥타령 吳翡翠 金素姬
Columbia 40412-A(21617)
短歌 錦繡江山 吳翡翠 鼓韓成俊
Columbia 40412-B(21624)
沈淸傳 沈淸下直 吳翡翠 鼓韓成俊
Columbia 40422-A(21616)
短歌 楚漢歌 吳翡翠 鼓韓成俊
Columbia 40443-B(21627)
沈淸傳 船人의게끌녀서 吳翡翠 鼓韓成俊
[콜럼비아 1934년 녹음]
Columbia 40519-A(22004)
短歌 片時春 吳翡翠 鼓韓成俊
Columbia 40524-A(22003)
春香傳 사랑가(伽倻琴竝唱)
吳翡翠 鼓韓成俊
Columbia 40540∼40545(1 22055∼2 22067)
唱劇 春香傳(一∼十二) 戀愛篇
李花中仙 金昌龍 吳翡翠 權錦珠 鼓韓成俊
Columbia 40546∼40551(1 22068∼2 22079)
唱劇 春香傳(十三∼二十四) 離別篇
李花中仙 金昌龍 吳翡翠 權錦珠 鼓韓成俊
Columbia 40552∼40557(1 22080∼2 22091)
唱劇 春香傳(二十五∼三十六) 再逢篇
李花中仙 金昌龍 吳翡翠 權錦珠 鼓韓成俊
Columbia 40570(1 22007)
伽倻琴竝唱 華容道(上) 吳翡翠 鼓韓成俊
Columbia 40570(2 22008)
伽倻琴竝唱 華容道(下)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255-B
水宮歌 중머리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262(1 21999)
伽倻琴竝唱 어화世上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262(2 21993)
短歌 竹杖芒鞋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268(1 R40)
伽倻琴竝唱 泰平天地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283-A
兎公傳 水宮景槪歌(上)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283-B
兎公傳 水宮景槪歌(下)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299(1 22000)
短歌 伽倻琴竝唱 가자어서가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315-B(R43-2)
雜歌 자진방아타령 李玉花
草琴姜春燮 伽倻琴吳翡翠 長鼓韓成俊
Regal C362-A
伽倻琴竝唱 春香傳 滿庭月色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362-B
伽倻琴竝唱 春香傳 꿈인가生時인가
吳翡翠 鼓韓成俊
Regal C390(1 R39)
春香傳(伽倻琴竝唱) 각지어라
吳翡翠 鼓韓成俊
[오케이 1934년 녹음]
Okeh 1728(K1413)
南道民謠合唱 배노래
主唱金素姬 助唱吳太石·吳翡翠
伴奏오케-鮮洋樂團
Okeh 1728(K1414)
南道民謠合唱 珍島아리랑
主唱金素姬 助唱吳太石·吳翡翠
伴奏오케-鮮洋樂團
Okeh K.1738-B 伽倻琴竝唱
沈淸傳 皇城途中방아찟는데(下)
吳太石 助唱金素姬·吳翡翠
大琴朴鍾基 奚琴金宗基
Okeh 1748(K1371) 伽倻琴竝唱
(沈淸傳) 郭氏夫人北邙山行
吳太石 助唱吳翡翠·金素姬
伴奏 大琴朴鍾基 奚琴金宗基
Okeh K.1755-A
南道雜歌 合唱 農夫歌
吳翡翠·金素姬·林芳蔚·吳太石
大琴朴鍾基 伽倻琴金宗基
Okeh K.1755-B
南道雜歌 合唱 자진農夫歌
吳翡翠·金素姬·林芳蔚·吳太石
大琴朴鍾基 伽倻琴金宗基
Okeh K.1767-A(K1340)
春香傳 五里亭離別(上)
吳翡翠 長鼓金宗基
Okeh K.1767-B(K1341)
春香傳 五里亭離別(下)
吳翡翠 長鼓金宗基
[오케이 1935년 녹음]
Okeh 1798(K54)
南道民謠 南道靑春歌 文湖月編曲
主唱愼淑 助唱吳翡翠 伴奏오케-鮮洋樂團
Okeh 1798(K67)
南道民謠 이야응打鈴 文湖月編曲
吳翡翠 愼淑 伴奏오케-鮮洋樂團
Okeh 1805(K55)
湖南民謠 강강수월래
主唱吳翡翠 助唱愼淑外數人
오케-古樂團伴奏
Okeh 1805(K121)
湖南民謠 쾌지나칭칭나네
主唱吳翡翠 助唱오케-歌手一同
오케-古樂團伴奏
Okeh 1826(K56) 短歌 鎭國名山
愼淑 伴奏長鼓吳翡翠
Okeh 1826(K57) 水宮歌中 獸會
愼淑 伴奏長鼓吳翡翠
Okeh 1860(K223)
唱劇調 薔花紅蓮 陰害編(上)
(오케 文藝部唱化) 吳翡翠
Okeh 1860(K224)
唱劇調 薔花紅蓮 陰害編(下)
(오케 文藝部唱化) 吳翡翠
Okeh 1868(K107B)
雜歌 개고리타령 愼淑 吳翡翠
伴奏丁元燮 朴鍾基
Okeh 1868(K137)
雜歌 성주푸리 吳翡翠 趙鎭榮
伴奏丁元燮 朴鍾基
Okeh 1876(K58) 春香傳 箕山影水
吳翡翠 長鼓朴鐘基
Okeh 1876(K59) 短歌 楚漢歌
吳翡翠 長鼓朴鐘基
Okeh 1892(K259)
短歌 世上事쓸데없다
愼淑 長鼓吳翡翠
Okeh 1892(K260)
春香傳 서방님듯조시오
愼淑 長鼓吳翡翠
Okeh 1899(K269)
春香傳 秋月江山
吳翡翠 長鼓林承鉉
Okeh 1899(K270)
水宮歌 公夫杖
吳翡翠 長鼓林承鉉
Okeh Record 1903(K268)
春香傳 郞君의손을잡고
愼淑 長鼓吳翡翠
Okeh Record 1903(K275)
春香傳 春香嘆息
愼淑 長鼓吳翡翠
Okeh 1918(K265) 短歌 玉樓紗窓
愼淑 長鼓吳翡翠
Okeh 1918(K273) 短歌 南原山城
愼淑 長鼓吳翡翠
[빅타 1937년 녹음]
Victor KJ-1138-A(KRE257)
南道民謠 둥가타령 愼淑 吳翡翠
玄琴申快童 大琴朴鐘基 奚琴·杖鼓
Victor KJ-1138-B(KRE259)
南道民謠 珍島아리랑 愼淑 吳翡翠
玄琴申快童 大琴朴鐘基 奚琴·杖鼓
Victor KJ-1140-B
兎公傳 座席다틈하는데 吳翡翠
Victor KJ-1163(KRE275)
俗謠 쾌지나칭칭
鄭柳色 助唱吳翡翠·愼淑
伴奏 玄琴申快童 大琴朴鐘基
Victor KJ-1163(KRE276)
俗謠 南道방아타령
鄭柳色 助唱吳翡翠·愼淑
伴奏 玄琴申快童 大琴朴鐘基
상기 음반 목록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오비취는 1934년에 콜럼비아에서 명창 김창룡, 이화중선, 권금주, 명고수 한성준과 함께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 음반(Columbia 40540∼40557, 18SP / 엘지미디어 LGM-K001, 2CD)을 취입했다. 오비취는 이 창극 춘향전 음반에 <사랑가>, <이별가>, <갈까보다>, <여보 사또님 듣조시오>, <십장가>, <옥중가>, <옥중상봉>, <춘향이 옥에서 나오는 데>∼<춘향이 어사 만나 춤추는 데> 등을 녹음했다.
오비취가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 음반(18SP) 외에 단가, 판소리, 가야금병창, 민요, 가야금 반주, 장고 반주를 취입한 음반은 지금까지 총 55면(27SP 1면 분량)이 확인되었다. 녹음시기와 음반회사 별로 살펴보면 1932년에 콜럼비아에서 7면, 1934년에 콜럼비아에서 15면, 1934년에 오케이에서 8면, 1935년에 오케이에서 20면, 1937년에 빅타에서 5면을 취입했다.
오비취의 녹음시기는 각 음반의 녹음번호, 신문광고 시기, 유성기음반 가사지의 발행시기, 엘지미디어가 일본 콜럼비아로 부터 제공받은 음반 목록(일본 콜럼비아가 한국 음반 발매 계획을 정리한 목록, 일제 때 발행된 책자로서 각 음반의 제작시기가 기록되어 있다)을 참고하여 고증하였다.
박옥희는 “어머니(오비취)가 1932년 11월 초에 일본으로 가서 콜럼비아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한 일이 있다”고 한다. 필자가 오비취의 음반을 고증한 결과 1932년에 오비취가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일이 있음을 확인했다. 박옥희가 어머니 오비취의 1932년 음반 취입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박옥희(1932년 양력 7월 26일 출생)가 오비취의 1932년 음반 취입 당시에 태어난지 백일이 좀 지났을 때였다는 말을 어머니 오비취로 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오비취는 1932년에 처음 음반을 취입했는데 단가 <초한가>(Columbia 40422-A)가 그의 첫 녹음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비취의 1932년 녹음 가운데 <초한가>의 녹음번호(21616)가 가장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4) ‘오비취 판소리 가야금병창’ 음반(엘지미디어 LGM-AK004, 1CD)의 첫번째 수록곡으로 오비취의 첫 녹음인 <초한가>를 넣었다. 박옥희의 증언대로 오비취가 1932년 11월 초부터 콜럼비아에서 녹음을 시작했다면 <초한가>는 오비취의 첫 녹음인 만큼 1932년 11월 초에 취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옥희는 “어머니(오비취)가 1937년에 모(某) 음반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한 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 기억은 1937년 빅타에서의 음반 취입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 제작된 ‘오비취 판소리 가야금병창’ 음반에는 오비취가 1932년과 1934년에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단가 3곡, 판소리 7대목, 가야금병창 10곡을 복각하였다. 이 콤팩트디스크에 복각된 오비취의 녹음 가운데 1934년 녹음은 오비취가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 음반(엘지미디어 LGM-K001, 2CD)을 취입하러 일본에 갔을 때 녹음한 것이다. 이 콤팩트디스크에 복각된 오비취의 모든 녹음에서 고수는 모두 한성준이 맡았다.
그 동안 오비취의 녹음이 몇가지 복원된 일이 있으나 오비취의 녹음만 모아 한 장의 콤팩트디스크로 복각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신나라레코드가 콜럼비아 음반회사에 보관되어 있는 오비취의 원반 녹음 일부를 불법으로 복사하여 제작한 음반이 있는데(판소리 여류 명창들(2) SYNCD-067, 가야금병창 명인들(2) SYNCD-055) 신나라레코드가 잡음을 없애는 과정에서 원음까지 손상되어 오비취의 음색이 제대로 복원되지 못했다. 이번에 엘지미디어가 ‘오비취 판소리 가야금병창’ 음반을 제작할 때에는 심한 잡음이 아니라면 대부분 그대로 두었다. 잡음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원음이 손상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잡음이 좀 있더라도 오비취의 본래 음색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상기 음반 목록에 나타나 있는 콜럼비아 음반 가운데 오비취가 1932년에 김소희와 함께 취입한 <흥타령>(Columbia 40393-A)과 오비취가 1934년에 가야금 반주를 한 <자진 방아타령>(이옥화 창, Regal C315-B)은 이번에 복각된 오비취의 독집 음반에서 제외되었다. 이번에 수록되지 않은 오비취의 녹음 <흥타령>과 <자진 방아타령>은 김소희와 이옥화의 음반을 기획할 때 넣을 예정이다.
|
2006-07-24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