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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 장영찬
  jangyungchan.jpg(사이즈:10.7KByte)
* 이는 '김연수 도창 창극 춘향전' 음반(지구레코드 JCDS-0575~0577, 3CD 박스물, 재판, 1997년 제작) 해설서 16~18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판소리 명창 장영찬 모습.

판소리 명창 장영찬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장영찬(張泳瓚)은 1930년 6월 28일(음력)에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에서 태어났다.(전북 순창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본명은 장주찬 또는 장석원(張碩原)으로 알려져 있다. 장영찬의 집안은 유서 깊은 국악 집안이다. 장영찬의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국악 명인이었다 하며 장영찬의 부친 장판개는 고종으로 부터 참봉직을 재수한 동편제의 거장이다. 현재 경주에서 제자 양성에 힘쓰고 있는 명창 장월중선은 장영찬과 사촌지간이다.
  장월중선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 장월중선(張月中仙, 본명:張順愛)은 1925년 4월 20일(음력)에 전남 곡성군 오곡면에서 아버지 장도순, 어머니 강모씨(姜某氏) 사이의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는 전북 순창 출신으로서 판소리를 잘 하셨다 하는데 내가 돐 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부친없이 자라는 것이 가엾다 하여 나를 많이 보살펴 주셨다. 아버지 위로는 형 장판개 명창, 아래로는 남동생 장길순씨, 여동생 장모씨(張某氏)와 장수향씨가 있었다. 장판개 명창은 슬하에 국찬씨와 영찬씨라는 아들을 둘 두었는데 장국찬씨는 26세에 요절하였고 장영찬씨는 40대에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7세부터 5년 동안 순창과 곡성에서 큰아버지인 장판개 명창에게 단가 <소상팔경>, <만고강산>, <진국명산>, 춘향가 중 <이별가>부터 <옥중상봉>, 적벽가 한바탕, 심청가와 수궁가 토막소리, 흥보가(박탄가) 중 <제비노정기>, <박타령> 등을 배웠다. 나의 작은아버지 장길순씨는 순창 출신으로서 국악을 하지 않았고 농사를 지었으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장수찬씨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장수찬씨의 누나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나의 둘째 고모 장수향씨는 순창 출신으로서 장판개 명창에게 판소리를, 박상근 명인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으며 무용으로도 명인이었다. 나는 10대 때 2,3개월 동안 영광에서 장수향 명인에게 가야금 풍류 48장과 박상근류 가야금산조, 장판개제 판소리, 그리고 무용을 배웠다. 사람들은 흔히들 내가 고모인 장수향 명인을 많이 닮았다고 했다. 나의 오빠 장태화(1922∼1989)씨는 기타 연주자로서 대구방송국 전속밴드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68세에 당뇨병으로 작고했다.”(1996.3.7.12:00∼13:00. 경북 경주시 국악협회 경북지부 신라국악예술단 사무실에서 장월중선 증언)
  장영찬은 정응민(춘향가와 심청가), 임방울(수궁가 일부), 김여란(춘향가 일부), 조상선(창극), 박록주(흥보가)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장영찬의 소리를 장판개의 녹음과 비교해서 들어보면 목구성이 많이 닮았다. 장판개가 일찍 작고하지만 않았어도 장판개의 뼈대있는 동편제 소리가 아들 장영찬에게 고스란히 전승되었을 것인데 안타깝다.
  성우향의 증언에 의하면 장영찬의 부인 성희경은 판소리, 민요, 무용을 두루 잘했는데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다 한다. 장영찬은 박귀희와 의남매 사이로 친했다 하며 정철호와는 친구로 절친했다 한다.
  장영찬의 부인 성희경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장영찬 명창은 13세부터 판소리를 공부하였다. 그 부친 되는 장판개 명창이 일찍 작고하여 부친에게는 판소리를 배우지 못했다 한다. 장영찬 명창의 어머니 김옥란(1884∼1955)씨는 순천 출신으로서 국악인은 아니었고 평범한 가정 주부였다. 장판개 명창과 그 부인 김옥란씨의 묘소는 전북 순창군 금과면에 있다. 장판개 명창은 일제 때 김명환 명고수와 함께 전남 곡성군 옥과의 이름난 갑부였다 한다. 장영찬 명창의 위로 누님(1902년 생) 한분과 형님 장국찬(1926년 생)씨가 있었는데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한다. 그리고 현재 장영찬 명창의 사촌 남동생인 장재찬(1934년 생, 장영찬의 작은아버지 아들)씨가 수원에서 살고 있다. 장영찬 명창은 전남 광주 규봉암과 안양 삼막사, 세검정 등지에서 판소리를 독공하였다. 나 성희경은 1936년 7월 23일(음력) 전남 광주 북동 38번지에서 아버지 성부일, 어머니 한이례 사이의 1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에서 예능 분야에 종사한 이는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 성모씨(成某氏)와 그분의 딸인 가수 윤복희씨이다.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 성모씨는 가야금산조와 병창, 무용을 잘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나셨는데 위로 언니 한복례씨, 아래로 여동생 한복초씨와 남동생 한일섭씨가 있었다. 나의 외삼촌 한일섭씨는 호적, 아쟁, 고수로 이름을 떨친 명인이고 큰이모인 한복례씨의 따님이 바로 명창 성창순씨이다. 나 성희경은 14세부터 국악에 입문하여 정광수 명창에게 약 2년 동안 춘향가 중 초입부터 <옥중상봉>을, 19세부터 약 3년 동안 공대일 명창에게 흥보가 토막소리를, 29세부터 약 3년 동안 김소희 명창에게 심청가 토막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14세 때 박영구 명인의 문하에서 무용, 시조, 양금 등을 배웠고 이매방 명인에게도 승무, 오고무 등의 무용을 사사했다. 나는 1948년 무렵에 조상선 명창이 이끌던 국극 단체에 입단하였고 그후 14년 동안 삼성국극단, 김연수 창극단 등 여러 국악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나 성희경과 장영찬 명창은 1940년대 후반에 창극 단체에서 만나 1953년에 혼인하였고 슬하에 딸(1954년 생) 하나와 아들 장지현(1961년 생)을 두었는데 딸은 일찍 죽고 아들은 현재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서 살고 있다. 현재 아들 장지현이 할아버지인 장판개 명창의 참봉 교지를 보관하고 있다. 나는 남편과 함께 부부가 모두 국악을 하면 가정사가 엉망이 될 것 같아 국악을 중도에 그만두고 가정 살림에만 전념했다. 장영찬 명창은 12년간 당뇨병을 앓다가 1972년 3월 21일(음력) 새벽 1시 서울 명륜동에서 작고하였다. 장영찬 명창의 묘소는 전남 곡성군 옥과에 있다.”(1996.10.24.16:00∼18:30. 서울 종로3가 백궁다방에서 성희경 증언)
  장영찬은 1962년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약 10년간 주연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 국악협회 주최로 열린 전국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20세 가량 연상인 선배 명창 김준섭(정응민의 수제자)과 실력을 겨루어 판소리 부문 대통령상을 받아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장영찬은 한참 명성을 날릴 무렵(1970년경) 병을 앓기 시작하여 녹음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 장영찬이 판소리 독창으로 남긴 음반은 없고, 다만 1971년에 릴테입으로 남긴 심청가와 흥보가의 일부 녹음이 있을 뿐이다.(고수:김명환) 이 장영찬의 릴테입은 귀명창들 사이에 복사되어 돌아다닐 뿐 아직 음반화 되지 못했다. 장영찬은 창극 음반만 두 가지를 남겼다. 장영찬은 1968년에 제작된 지구레코드의 김연수 도창 창극 춘향전 음반에 이도령 역을 맡아 녹음을 했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에 현대음반에서 제작된 창극 심청전 음반에서는 장영찬이 성우향과 함께 도창을 했는데, 당시 건강이 안좋았던 장영찬은 길게 소리를 못하고 아니리만 녹음하였다. 따라서 장영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68년에 녹음된 지구레코드의 창극 춘향전 음반에 장영찬의 성색이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셈이다.
  이 창극 춘향전 음반에 담긴 장영찬의 녹음을 들어보면 그의 춘향가는 정응민의 바디가 주를 이루고 거기에 김여란과 김연수의 소리제도 일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봉선의 증언에 의하면 장영찬은 판소리 외에도 꽹과리를 잘 연주했다 하며 김일구가 1971년부터 2년여 동안 장영찬에게 심청가를 배운 바 있다 한다. 그리고 성희경의 증언에 의하면 안향련과 김동애도 장영찬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한다. 안향련은 춘향가와 심청가 전바탕을, 김동애는 춘향가 초입부터 <옥중상봉>, 심청가 토막소리를 배웠다 한다. 성희경도 한때 남편인 장영찬에게 춘향가 초입부터 <천자뒤풀이>까지 배웠다 한다.

200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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