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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노재명 저서 [판소리 명창 성우향](경기 고양:지구레코드, 성우향 흥보가 CD음반 부록 서적, 지구레코드 JCDS-0697~0698, 2CD 1책 박스물, 1998년 12월 제작) 112~137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판소리 명창 성우향 흥보가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 ‘성우향 흥보가’ 1977년 공연실황 음반(지구레코드 2CD, 1999) 흥보가 전바탕 녹음의 해설과 사설
판소리 다섯바탕 가운데 가장 해학적이고 서민적인 소리를 꼽자면 가장 먼저 흥보가를 들 수 있다. 그래서 흥보가는 지배계층이 소리를 즐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변강쇠타령 등 지금은 거의 불리고 있지 않은 판소리 일곱바탕과 함께 자칫하면 없어질 수도 있었다. 특히 일제 때 여류 명창들이 판소리계를 석권하면서부터 더욱 이 흥보가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흥보가가 재담소리이면서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그 내용이 매우 보편적으로 공감을 줄 수 있는, 먹고 사는 생사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만일 박록주란 명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소리의 위치는 매우 협소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여류 명창들은 여성이 주인공이고 화사한 느낌을 주는 춘향가나 심청가를 장기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박록주는 특이하게 남자 명창들이 즐겨 부르던 흥보가를 특기로 삼았다. 박록주는 중년 이후에는 거의 흥보가만 불렀고 흥보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박록주의 판소리 중에서 흥보가는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으나 흥보가 외에 다른 판소리는 현재 거의 불리지 않고 있다.
박록주가 여러 스승들 문하에서 여러 판소리를 두루 배웠는데도 유독 흥보가를 장기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적벽가는 우조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에 부르기가 드세며 남성들의 싸움 내용이라서 여류 명창이 부르기에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박록주 또한 적벽가를 잘 부르지 않은 것 같다.
수궁가는 서로 물고 물리는 인간사를 별주부, 토끼, 용왕을 통해서 풍자한 것이다. 토끼가 평소에 포수한테 쫓기고 맹수한테 쫓기다가 자라의 유혹에 속아서 수궁에 들어가고 수궁에서 죽을 위기에서 살아나고 세상에 다시 나와서 사람의 덫에 걸려 죽을 뻔하고 독수리 밥이 될 뻔하고 죽을 고비에서 살아날 때마다 토끼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한다. 그리고 또 어떤 희노애락이 펼쳐질지 모르는 녹수청산에서 토끼의 삶은 계속되고 수궁가는 어질더질 끝난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고난에 찬 인생살이를 겪은 박록주가 그런 파란만장한 인간사를 동물세계로 빗대서 그린 수궁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랑을 다룬 춘향가의 경우에 박록주가 학습 초기에는 즐겨 불렀지만 사랑의 시련을 많이 겪고 난 중년 후에는 자신의 현실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별로 부르지 않았다.
부친에 대한 효를 그린 심청가의 경우에도 박록주가 학습 초기에는 즐겨 불렀지만 중년 후에는 별로 부르지 않았다. 어두운 가정 환경, 사랑의 시련, 자살 기도, 자신을 고생시킨 부친에 대한 원망 등 눈물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가정사를 잊기 위해서라도 박록주는 슬픈 심청가 보다는 흥보가와 같이 명랑하고 밝은 소리를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참하게 살던 흥보가 박을 타서 부자로 역전 되는 과정을 통해서 박록주도 희망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또한 박록주가 본래 타고난 소박하고 밝은 심성이 해학으로 가득찬 흥보가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요즘 가장 활발하게 전승되고 공연되는 흥보가는 박록주, 박봉술, 김연수, 강도근, 박동진 바디다. 이 가운데 박동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송만갑의 흥보가를 직,간접적으로 이어받았다. 그러니 여러 유파의 흥보가 중에서도 특히 송만갑의 동편제 흥보가가 예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가장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다른 유파의 동편제 흥보가는 현재 접하기가 어렵다. 흥보가는 송만갑이 즐겨 불렀던 장기다. 그의 흥보가는 박봉래를 거쳐 박봉술에게, 김정문을 거쳐 박록주와 강도근에게 이어졌다. 송만갑제 소리 중에서 흥보가는 박록주에 의해서 잘 전승되어 오늘날 많은 후학들이 박록주제 흥보가를 부르고 있다.
박록주는 여류 명창이면서도 매우 남성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데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가 투박하고 꿋꿋한 소리제를 구사한 것은 그가 남자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겠다. 그리고 그가 타고난 성음 자체가 강한 인상을 주며 그의 고난에 찬 인생살이가 그를 강직하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박록주는 대체로 바탕소리보다는 토막소리 위주로 공연을 했기 때문에 아니리는 극히 짧으며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멋이 있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전라도 지역이라서 전라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산에서 태어난 박록주는 경상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기 때문에 매우 특이하다. 남성을 능가할 정도의 통성을 위주로 해서 소리를 끌고 나가며 소리 맺음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고 분명하다. 성음은 엄성이 많이 쓰이며 정대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서편제의 더늠을 부르더라도 동편제의 특성을 가미해서 소리가 매우 진중하다.
본 음반에 수록된 박록주 제자인 성우향의 흥보가 녹음을 들어보면 그런 박록주제의 특징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성우향은 거기에다 정응민제 보성소리 성음도 많이 가미해서 부르기 때문에 이번에 발굴되어 소개되는 이 ‘성우향 흥보가’ 공연실황은 기존에 듣던 여타 박록주제 흥보가 음반들과 다른 독특한 맛이 있다.
박록주는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간직하고 있다가 1950년대부터 차츰 자신의 개성에 맞게 고쳐서 불렀다 한다. 그런 까닭에 같은 박록주 문하생이라도 1961년 무렵에 배운 박귀희와 1970년대 초반에 배운 정의진의 소리는 차이가 있다. 박귀희가 배운 흥보가는 김정문제에 가깝고 정의진이 배운 흥보가는 박록주가 새로 짠 소리제에 가깝다.
성우향이 박록주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것은 1960년대 초반. 따라서 성우향의 흥보가 녹음은 계속해서 변화를 겪으며 다듬어져 나갔던 박록주제의 1960년대 초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실제로 성우향의 흥보가를 박록주의 1960년대 후반 이후 녹음과 비교해 보면 사설이나 음악이 다소 다르다.
본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성우향의 흥보가 녹음은 1977년 4월 30일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펼쳐진 공연실황이다. 본 음반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여류 명창들이 잘 부르지 않고 있는 <놀보 박타령>~끝 부분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성우향의 <놀보 박타령>~끝 부분의 사설은 박헌봉의 [唱樂大綱](서울:國樂藝術學校 出版部, 1966) 346~358쪽 수록본이다. 성우향은 이 창본 사설을 보고 거의 대부분 정응민제 보성소리를 토대로 하여 <놀보 박타령>~끝 부분을 작곡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성우향의 작곡이 아닌 것은 1970년 무렵 성우향이 김숙자한테 배운 <놀보 제비노정기>(안남산)이다.(1998년 12월 1일 성우향 증언)
성우향의 <놀보 박타령> 녹음을 박헌봉의 [창악대강]에 실려있는 사설, 장단과 비교해 보면 성우향이 [창악대강]에 기록되어 있는 장단은 거의 참고치 않고 거기의 사설만 따서 자신이 직접 장단도 붙여 작곡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음반에 나타나 있는 성우향의 뛰어난 작곡력을 보고서 필자는 그의 폭넓은 역량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성우향의 <놀보 박타령>에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남사당패 등이 나오는 여러 재담소리가 아니리로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대목은 판소리의 초기 생성 배경을 일부 알 수 있는 귀중한 옛 더늠으로서 옛 남자 광대들의 가장 재미있는 판소리 볼거리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를 되살렸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성우향의 스승 박록주 역시 <놀보 박타령>을 녹음한 바 있다.(지구레코드 LM-120180 3LP, JCDS-0435~6 2CD, JCS-2640~2641 2MC / 1967년 녹음 / 고수 정권진)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유일하게 이 음반에만 박록주의 <놀보 박타령> 녹음이 담겨있다. <놀보 박타령>은 여류 명창이 부르기에 난처한 사설이 많아 배우거나 부르는 일이 드물다. 박록주도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까지만 배우고 그 뒤는 안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구레코드의 ‘박록주 흥보가’ 음반이 콤팩트디스크로 재발매되기 전까지는 박록주의 제자들 조차 박록주가 이 대목의 소리를 생전에 했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이 음반에 들어있는 <놀보 박타령>은 박록주가 직접 짠 것으로 추정되는데 매우 간략하게 짜여져 있다. 이 박록주 녹음에는 <놀보 제비노정기>가 없고 <놀보 박 타는 데>도 매우 짧다.
박록주가 짠 <놀보 박타령>의 구성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놀보가 진양조로 첫째 박을 타니 박속에서 남사당패가 나와 <화초사거리>, <성주풀이>를 부른다. 놀보가 중모리로 둘째 박을 타고 나면 박속에서 놀보를 혼내주려고 샌님이 나와서 주머니를 내밀며 돈이나 쌀로 주머니를 채우라고 한다. 그리고 놀보가 주머니에 쌀과 돈을 넣는 장면이 단순한 사설과 자진모리 장단으로 그려진다. 놀보 셋째 박은 중모리로 타고 그 속에서 장군이 나와 놀보의 행실을 꾸짖으며 목을 베겠다고 하니 이때 흥보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중모리에 계면조로 장군에게 애원하여 놀보를 구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박록주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김소희, 한애순, 박귀희, 성우향, 조상현, 이옥천, 한농선, 정성숙, 조순애, 박송희, 박초선, 성창순, 정의진, 김명심, 남해성이 그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이 가운데 박송희는 김연수의 <놀보 박타령> 창본에 기록되어 있는 사설을 보고 옛 소리식으로 작곡을 하여 박록주한테 배운 흥보가에다 붙여서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박송희의 증언에 의하면 박록주가 생전에 <놀보 제비노정기>(안남산)를 알고 있었다 한다. 박송희는 그 <놀보 제비노정기>를 박록주한테 배워서 <놀보 박타령> 앞에 삽입시켜 부르고 있다.(지구레코드 JCDS-0674-1~3 3CD / 1991년 녹음 / 고수 김청만) 박록주, 성우향, 박송희 외에 박록주 계열에서 <놀보 박타령>을 부르는 이는 아직 없다.
1977년 성우향 흥보가 공연 때는 그의 스승인 박록주를 비롯해서 민속악회 ‘시나위’가 특별 찬조출연하여 박록주는 단가 <백발가>를, ‘시나위’는 <취타> 등을 연주했다. 이 찬조출연 녹음은 저작권 문제 때문에 본 음반에 수록되지 못했는데 당시 박록주는 병세가 심해 거동 조차 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고 우렁찬 소리를 들려주었다. 이때 박록주는 무대에 나가 다음과 같이 격려사와 함께 단가 <백발가>(고수:김명환) 절반을 불렀다.(총 3분 10초)
“성우향이, 이는 내가 쉰아홉살 먹어서 흥보가를 내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일러주구는 오늘날까지는 저를 자주 만내지 못했는데 에 오늘 이걸 헌다고 나를 찾아오고 초청을 하고 제가 기여이 선생님이 나오셔야 되겠다고 구래서 아픔을 무릅씨고 이렇게 나와서 봤드니 내가 죽은 줄 알았드니 (울먹이며) 그래두 내 뒤에는 사램이, 사램이 있습니다.
나이 인제 칠십세살이라 이렇게 걸음도 잘 못걷고 출입을 잘 못합니다. 그리구 오늘 여기 와서 단가 한마디라도 위로를 해달라고 하는데 원체 숨이 가쁘고 떨리서 소리를 할 수가 없는데 하는 데까진 서너마디라도 해보겠다 하는 생각은 했으나 (울먹이며) 지금 무대에 오르니 마음이 울음부터 먼저 나옵니다. 단가를 해보고 한 서너마디만, 못하면 한 두마디만 허고 말겠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용서해 주세요.
그러고 여 성우향이 끝까지, 인제 후진들이 인제는 다 우에 선생들보다가 잘하니 인제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중모리) 어화 청춘 소년님네 백발 보고 웃들 마소.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다. 우산으 지난 해는 제경공으 눈물이로구나. 분수추풍곡은 한무제의 설움이라. 장하도다 백이숙제 수양산 깊은 곳에 채미하다가 아사를 헌들 초로같은 우리 인생들은 이를 어이 알겠느냐. 야야 친구들아 승지강산 구경가자. 금강산 들어가니 첩첩히 경산이요 곳곳마두 경개로구나.”
성우향은 본 공연에서 흥보가로 들어가기에 앞서 단가 <철인가>를 불렀으나 이해식 소장 릴테입에는 <철인가>의 끝부분만 조금 녹음되어 있어서 이 단가는 ‘성우향 흥보가’ 음반에 수록되지 못했다.
본 흥보가 녹음은 이해식이 공연 현장에서 릴테입으로 직접 녹음한 것인데 간혹 마이크에 손이 닿는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소리꾼의 창, 고수의 북반주와 추임새, 관중의 추임새와 웃음소리 등이 균형있게 잘 녹음되었다. 특히 김명환의 북가락과 추임새가 생생하게 담겨있어 그의 고법을 연구하는 데 있어 어느 녹음보다도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래전 릴테입인 탓에 전체적으로 노화로 인한 잡음이 낮게 깔려있다. 그리고 전문 공연장이 아닌 강당에 무대를 설치한 까닭에 방음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공연무대 밖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가끔씩 들어가 있다.(이하 생략)
* 2007년 7~12월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국악자료 인터넷 DB구축 정보화(전통예술 아카이브 구축사업 선정) 국고보조금 지원: 문화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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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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