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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사진: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0097(필름 있음)
1995.12.12.19:00~22:30.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64-1 두레빌딩 지하 서울두레극장.
한애순 심청가 공연 장면. 촬영: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 1995.5.15.16:40~17:10,1995.12.12.18:00~18:10,1995.12.15.10:00~10:30.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관장이 한애순 명창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애순 명창의 건강이 좋지 못해서 장시간 많은 증언을 듣지 못하였습니다.(2008.3.30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명인실에 발표)
판소리 명창 한애순 증언 내용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한애순이 말년에 보유하고 부른 판소리 춘향가는 정정렬제와 박동실제가 섞여 있는데 예전에 전남 광주에서 김여란이 춘향가 공연하는 것을 목격하며 습득한 점, 김소희 춘향가 음반을 참고하는 등의 노력으로 정정렬제 춘향가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애순은 말년에 심청가의 경우 박동실제, 적벽가는 박동실제와 임방울제, 수궁가도 박동실제와 임방울제, 흥보가는 박록주제로 부른다고 한다. 한애순은 젊어서 창극 국악 단체에 소속되어 전국으로 활동하고 다니면서 어려서 박동실한테 배운 바탕소리를 많이 잊어 버렸다 한다.
한애순은 11세 때부터 5~6년간 박동실에게 단가 <강상풍월>, <장부가>, <초한가>, <사절가>(때 마참 봄이로다:박동실 작곡), 판소리 다섯바탕 대부분을 배웠다. 한애순이 박동실에게 가장 먼저 익힌 소리는 <강상풍월>이라 한다.
한애순은 13세 때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단가 <뒷동산>, 춘향가 중 <이별가>, 수궁가 중 <산신제 지내는 데>~<녹수청산>, 남도민요 <진도아리랑>, <쾌지나 칭칭> 유성기음반을 취입했다.
당시 한애순은 김소희, 신숙과 함께 서울에서 녹음을 하였고 당시 고수는 한성준이었다 한다. 남도민요의 경우는 정남희(가야금), 박종기(대금) 등의 기악 반주자도 함께 녹음을 했다 한다.
한애순이 그때 받은 녹음 사례비는 100원이었고 그 음반 취입은 김소희, 박석기의 추천으로 성사된 것이라 한다. 한애순이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유성기음반 취입을 마친 직후 부친 부고를 들었다고 한다.
한애순이 유성기음반에 남긴 단가 <뒷동산>은 오수암 제자 임춘앵이 광주에 왔을 때 한애순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임춘앵과 한애순은 동갑 죽마고우로서 서로에게 소리를 가르쳐 주었다 한다.
한애순이 유성기음반에 취입한 춘향가 중 <이별가>, 수궁가 중 <산신제 지내는 데>~<녹수청산>은 박동실 문하에서 배운 소리라 한다. 그리고 한애순이 유성기음반에 취입한 남도민요 <강강수월래>, <쾌지나 칭칭>의 경우 메기는 소리는 신숙이, 받는 소리는 김소희와 한애순 등이 담당하였으며 한애순은 상청, 김소희와 신숙은 하청으로 불렀다고 한다.
한애순의 증언에 따르면 박동실은 안중근전, 조선역사가, 유관순전 등 신작판소리를 많이 지어 불렀고 단가 중에서는 <초한가>를 잘했다 한다. 박동실이 남한에서 활동하던 시절 "창극 무대 작곡은 조상선, 판소리 바탕소리 작곡은 박동실"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곤 하였다 한다.
한애순의 말에 의하면 박동실은 소리를 너무 많이 해서 목이 뒤집어졌는데 목은 안좋았으나 방안소리가 일품이었다 한다. 박동실의 남동생은 명창 박영실, 박영실의 아들은 아쟁 연주자 박종선, 가수 김정호가 이 집안 후손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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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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