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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 이용배 증언 내용
  iyongbe.jpg(사이즈:7.0KByte)
* 상기 사진: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판소리 명창 이용배 흑백사진(1971년경).
*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관장이 1995년 5월 17일과 2002년 5월 30일 이용배 명창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2008.5.30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명인실에 발표)
* 여기 정리되어 있는 증언 외에도 2002년 12월 24일에 이용배 명창이 증언한 내용도 있는데 이는 차후 판소리 명창 이용배 증언 내용 2편을 통해서 정리,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비디오테입 관리번호 MI6V-0377(대담·촬영:노재명)
2002.12.24.14:00~15:30.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국악방송국 스튜디오. 노재명 진행의 ‘명인 명창 명음반’ 방송 프로그램 출연자 이용배 증언과 이용배(소리) 이덕인(고수) 단가 <남원산성>(임방울 작곡), 판소리 흥보가 중 <흥보 집 짓는 데>, <박타령>~<화초장타령>, 적벽가 중 <적벽강 불지르는 데>~<새타령> 수록.

판소리 명창 이용배 증언 내용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약 40년 전에 김창룡의 장남 김세준이 임방울, 강남중, 박록주 등과 함께 창극, 국극 단체에서 함께 활동한 바 있다. 이용배는 40년 전(1950년대 중반) 목포에서 김세준을 모시고 국악 단체 생활을 한 바 있다. 김세준은 1900년 무렵에 출생했으며 남의 흉내를 잘 내고 늘 주위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재담꾼이었다.
  김세준과 강남중, 임세근은 친구 사이로 서로 재미있게 농담을 주고 받곤 했다. 임세근은 임방울의 둘째형으로서 판소리 고수이자 태평소 명인으로 활동하였고 김세준은 임방울보다 네 살 가량 연상이었다. 김세준은 임방울의 판소리 공연시 고수로 몇차례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세준은 경기도 출신의 명창 백점봉과 가까운 사이였다. 백점봉은 이용배보다 25세 가량 연상이었다.
  김세준은 창극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다. 김세준은 목이 안좋았고 창극단의 토막 창극에 방자 등의 조역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으며 주로 고수로 활동했다. 그리고 김세준은 아쟁, 가야금도 연주하였다.
  이용배는 김세준 동생을 처음에 수원에서 만나서 이 집안 사람들을 경기도 사람으로 알고 있다. 이용배는 김세준이 자신보다 15세 정도 연상이라고 기억한다. 이용배가 김세준과 교류할 당시 김세준은 전라도, 경기도 말씨가 섞여 있었고 키는 보통이었으며 제자는 없었다. 이용배는 김세준을 1950년대 마지막 목격하고 그 뒤로는 못봤다.
  김세준은 당시 첫째, 둘째 동생과 함께 창극단에 있었다. 김세준의 첫째 동생 김종선은 아쟁 연주자이며 김세준 보다 2세 가량 연하인데 김종선과 박록주(1905년 출생)는 오빠, 동생 하며 의남매로 지냈다. 김종선의 아쟁 연주는 남도 가락이었다. 김세준 둘째 동생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며 김세준 보다 4세 가량 연하였다. 김세준의 둘째 동생은 태평소, 피리 등 관악기 연주자이며 당시 창극단의 홍보를 담당했다. 김세준의 둘째 동생의 관악기 연주는 경기 가락이었는데 잘 불었다. 김종선은 키가 작았고 김세준의 둘째 동생은 키가 크고 경기도 말씨, 무뚝뚝하고 고지식했다 한다.
  당시 창극 공연 홍보는 태평소, 꽹과리, 징, 장고 총 4명이 길군악을 치며 동네를 돌아다니며 1,2시간 내지 길게는 3,4시간 정도 홍보를 하였다 한다.
  국악인 가운데 김옥련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많은데 이용배보다 7,8세 연상인 김옥련은 고향이 광주이며 부산, 마산에서 주로 활동했고 곧잘 소리를 잘했고 딸 하나 있었고 박동실과 김연수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1960년대 마산에서 살다가 섬으로 시집갔으며 그 동생은 김옥진(?)이라고 한다.
  이용배의 증언에 따르면 유성준은 송만갑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한다. 정원섭은 소리 잘하고 북을 잘 쳤다 한다. 방진관, 김차돈은 이용배가 잘 모른다고 한다.(1995.5.17.13:30~14:30.이용배 증언)

  나 이용배(1935년 출생)가 만난 때가 23세 땐가 (박봉술 명창을) 만났어요. 그때부터 박봉술 선생님을 알게 됐죠.
  박봉술 선생님이 원래 원 고향은 구례군 용방면 중방리가 고향이에요. 그런데 그 후로 순천에 내려가서 살았습니다. 순천 금곡동에서.
  박봉술씨는 소리로 명창이고 또 적벽가로서는 송만갑씨 제자로서 그 양반밖에는 없었고, 그 당시에는 보성에 사신 정응민 선생님도 계셨고 또 광주에서 성원목 선생이나 정광수씨 그 양반도 광주국악원에 계셨고 그랬는데 그때 당시에는 하여간 적벽가 소리를 들을라면은 순천에 가서 박봉술 선생님한테 그 소리를 배워야 된다, 아주 그 선생님한테 많이 배웠죠. 그 양반 제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이 딱 마음에 드는 사람만 가르치고 그랬죠.
  그때는 적벽가 같은 것도 우리가 먼저 임방울 선생님한테도 했고 박봉술 선생님한테도 내가 한바탕을 했고 그리고 그 양반 한 52세 넘어서 그때 광주에 있는 송순섭이 그 양반도 가르치고 또 여자들도 죽은 한농선 그 양반 가르치고 또 광주 사는 나이 많은 여자 명창들 이금화, 성산옥이라든지 그런 사람들 많이 가르쳤어요.
  23세 때 나는 박봉술 선생님하고 단체 생활하며 공부를 했어요. 단체는 그때 국극사, 돌아가신 박록주씨가 그때 단장인데 그 단체에 같이 다녔어요. 그 단체가 한 30~40명 됩니다. 단체 생활도 한 30년 동안 같이 했어요.
  그 선생님이 소리는 누구보다 잘하시고 그랬는데 제일 하나 딱한 것은 그 목이 좀 탁목이었어요. 목이 항성이 좀 없고 목이 좀 안좋아서 그렇지 소리로서는 대가고 왕이죠 왕. 소리로서는 그 만큼 소리할 수 있는 분 없습니다.
  가르칠 때 선생님도 방법이 옛날 선생님들 그 방법이에요. 소리 쭉 하고 소리는 그렇게 하는 거다 그러고. 그러고 이제 독공을 많이 해야죠. 선생님이 예술가로서 마음이 모질지 않고 아주 마음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또 이제 단체 생활을 많이 했어요. 서울, 부산에서도 같이 지냈고 순천에서도 내가 선생님 댁에 가서 한 1년 동안 같이 생활도 했고 저하고 떨어진 것이 거의 없죠. 꼭 사회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둘이 꼭 부부지간 같다고. 하루나 이틀 떨어져 못보고 그러면 서로 만나고 그런 사이였어요.
  우리 국악인치고는 상당한 그 구한문을 좀 많이 알아가지고 박식해요. 그 집안에서 보면 원래 송만갑씨 제자로서 그때는 친형인 박봉래씨가 있었고 또 남자로 하나는 남원에 있는, 박록주씨가 공부한 정문씨, 김정문 그 선생님이 있었고 박봉술씨는 아버님이 그렇게 소리를 잘하셨어요. 왜 소리를 잘했냐 하면 박봉래씨를 공부 가르치기 위해서 송만갑씨를 인자 순천으로 모셔다가 공부를 할 때 거기서도 그렇게 많이 소리를 박봉술씨 아버님께서 듣고, 또 원래 소리 잘하시는데다 소리를 많이 듣고 그러니까 그 오바탕, 다섯바탕을 박 선생한테 인제, 아버님한테 좀 공부를 하셨죠. 박만조인가 그럴 겁니다.
  거기서 많이 했고 이제 그 후로 공부를 다 해갖고 깪이기는, 다시 이제 서울로 가서 서울 성악연구회에서 가가지고 송만갑씨한테 다시 또 그 똑같은 바디니까, 그래서 거기서 닦고 그랬죠.
  그 양반이 소리를 어떻게 지르고 그랬던지간에 기운이 역대 장사에요 장사. 근데 돌을 갖다 어깨에다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서 소리를 해야 된다 그러니까 돌을 지고 산에 올라가 소리를 하다가 그러니까 열이, 열기 팍팍 올라오지요, 힘을 콱 주니까 그래서 목이 깨지고 목이 나갔어요.
  그 양반이 그때 당시로서도 오바탕, 다섯바탕 소리를 다했습니다. 여하튼 소리로서는 거물입니다 거물. 목이 짧아서 그라지 소리로서는 그렇게 알고 소리하시고 그런 분이 없죠.
  아쟁하는 김일구가 자기 집에서 김일구도 공부를 좀 했거든요 박봉술씨한테. 자기 생일 때 박봉술 선생님을 초빙했는데 이 사람이 참 그 선생님을 참 초빙했으면, 오셨으면 잘 차 타고 가도록 이렇게 딱 했어야 했는데 선생님 혼자만 가시라 그래 놓고 그냥 어둑어둑 가는데 그러니까 차가 속도 빠르게 오니까 차에 치어서 그렇게 돌아가셨죠. 그래서 1년 가차이 말도 못하고 척추가 다쳐 가지고 그래서 떠나셨죠.
  아들 삼형제, 딸이 하나. 딸이 박춘경이라고 죽었습니다만 소리를 곧잘 했어요. 죽은 안향련이보다 소리를 더, 공력이 더 좋았어요. 소리를 그렇게 잘했어요. 큰아들도 운전하다가 죽고 그 짝으로 다 가버렸습니다. 자식들 싹 다 죽었어요. 친척은 형님 딸, 조카딸, 여자가 소리 잘하고 아주 잘했습니다. 지금 저 거기도 나이가 70이 좀 넘으니까 조카딸 하나 있고 직계로서는 지금 없지요.
  예술가로서 여러모로 자질도 있고 또 무식하지 않고 박식하고 예술가로서는 그(박봉술) 만한 예술가가 없습니다. 굉장히 훌륭한 분이지요. (이용배와 박봉술) 나이 차이가 13세 차이가 나지요. 나는 스승겸 형아 동생 하는 그런 경우였으니까 저하고 지낸 것은 말할 수 없이 지냈지요. 박 선생 돌아가실 때까지라도 자타가 다 압니다. 제가 친하게 지냈어요. 돌아가실 무렵에도 나 보고 그러고 돌아가셨어요. 아까운 분 돌아가셨지요.
  목은 딱하지만 소리 공력은 그 만한 공력이 없습니다. 또 소리를 알고 하신 분은 그 만한 분이 없어요. 돌아가신 8명창, 5명창 빼놓고는 그 양반(박봉술) 같은 분이 없지요. 소리 잘하셨습니다.(2002.5.30.이용배 증언)

2008-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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