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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이일주 판소리 명창 모습.
* 2003.3.14, 2010.10.6.10:40~11:20.노재명이 이일주 명창을 인터뷰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신 이일주 명창께 깊이 감사드립니다.(2010.10.7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명인실에 발표)
판소리 명창 이일주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판소리 명창 이일주(본명:이옥희)는 1936년 2월 22일(음력)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가탐리에서 부친 이기중과 모친 강화자 사이의 3남 4녀 중 오빠 다음 둘째, 장녀로 태어났다.
이기중은 서편제 대명창 이날치의 친손자이다. 이날치는 담양에서 살았고 장성에서 이일주 조상 장례를 치루었으며 정읍 정우면 살막에 이일주 할머니 묘소가 있다 한다.
이일주는 8세부터 3~4년간 두 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부친 이기중 명창에게 단가 <공도난이>,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 심청가 중 <심청이가 밥 빌러 다니는 데>, 숙영낭자전 등 이날치제 소리를 배웠다. 이일주와 같이 공부한 여동생은 지금은 소리를 작파하고 청주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그 외 이일주의 다른 형제들은 국악을 하지 않았다.
이기중은 1913년에 출생한 소띠이고 환갑 지나 1975년경에 별세하였다. 이기중은 담양에서 태어나 여러 지역으로 이사하며 다녔는데 한산, 서천, 서산, 부여 등 주로 충청도에서 살았다 한다. 이일주 모친 강화자는 고향이 충청도이고 예술은 하지 않은 가정주부이다.
이기중은 명창 신영채와 단짝으로 친하게 같이 다녔는데 구사하는 판소리 바디도 서로 비슷했다. 신영채는 이기중보다 연상이어서 이기중이 형님이라 불렀고 소리를 잘했다 한다.
이기중은 여러 곳을 다니며 멍석 깔고 관객을 모아 판소리 공연을 했으며 이때 어린 이일주 등 가족이 함께 다니면서 목격을 했는데 당시 이기중이 사람을 울리고 웃기고 소리를 기가 막히게 잘했다 한다. 하지만 이렇게 사방으로 다니며 멍석 깔고 공연한 것은 이일주가 지금도 창피한 일로 기억하고 있으며 고생이 엄청나게 많았다 한다.
이후 이일주는 돈을 착실히 벌어서 부친 이기중에게 논을 사주었고 부친이 그 논에서 농사 지으며 재밌게 살았다. 이기중 녹음은 남아있지 않고 사진은 이일주 남동생이 가지고 있다.
이기중 생전에 이날치 벼슬 교지 여러개를 신주 모시듯 소중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6.25 한국전쟁 때 그런 거 가지고 있으면 북한 인민군한테 죽는다 하여 이기중이 직접 모두 불태워 없앴다 한다.
이일주는 27~28세 때 서울 낙원동 박초월 문하에서 단가 <강상풍월>, 판소리 흥보가를 사사했다. 그리고 이일주는 30세 때 8개월 가량 김소희한테 단가 <운담풍경>, 판소리 춘향가 중 <술상 차려> 등을 배웠다. 당시 학비를 내고 나면 식비가 없어서 경제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한다.
그러다가 이일주는 40세부터 오정숙 작고 때까지 오정숙 문하에서 동초 김연수제 단가 <이산 저산>, 판소리 다섯바탕을 익혔다. 이일주는 바로 이때 오정숙한테 배운 동초제 심청가로 현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활동 중이다.
다소 아쉬운 점은 이날치-이기중-이일주로 전승된 유서깊은 이 가문의 소리가 무형문화재로 보호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일주가 초년에 부친 이기중한테 배운 그 소리들은 여러 스승들을 거치면서 상당 부분 잊어버린 상태이다.
한편 이일주는 신관용 제자에게 가야금풍류와 산조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가야금산조는 지금도 연주를 한다. 당시 가야금병창 하면 판소리가 못쓰게 된다 하여 병창은 배우지 않았다 한다.
이일주는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 현대아이파크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오늘날 소리 잘한다 싶은 젊은 판소리인이 나오면 상당수가 이일주 계보의 문하생이라 할 만큼 이일주는 판소리 재목을 잘 발굴하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고 제자 복도 많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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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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