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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한국음반학 제22호](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2012년) 187~257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국악 유성기음반 관련 명인명창 주요 증언자료 해제<1>
글/노재명(한국고음반연구회 회원, 국악음반박물관 관장)
- 목 차 -
◯ 가야금 명인 심상건 관련(국악학자 이보형 증언)
◯ 판소리 명창 김초향 증언
◯ 판소리 명창 박록주 증언
◯ 판소리 명창 정광수 증언
◯ 해금, 정가, 전통춤 명인 김천흥 증언
◯ 가야금 명인 김죽파와 그의 여동생 판소리 명창 김은희 증언
◯ 판소리, 가야금 명인 김연수 증언
◯ 판소리 귀명창 김길희 증언
◯ 판소리 명고수 김명환 증언
◯ 가야금, 거문고 명인 방금선 증언
◯ 판소리 명창 김소희 증언
◯ 서도소리 명창 이은관 증언
◯ 가야금 명인 함동정월 증언
◯ 은률 삼현육각, 서도소리 명인 김영택 증언
◯ 가야금, 판소리 명인 박귀희 증언
◯ 판소리 명창 한애순 증언
◯ 판소리, 가야금 명인 김차돈 증언
◯ 판소리 명창 김효순 증언
◯ 전통춤·경기민요 명인 이경자 증언
◯ 판소리 명창 박송희 증언
◯ 판소리 명창 김화선(김여막) 증언
◯ 판소리 명창 김용준 증언
◯ 판소리 명창 성우향 증언
◯ 판소리 명창 조상현 증언
◯ 경기민요 명창 이희완 증언
◯ 판소리 명창 신영희 증언
◯ 판소리 명창 김영자 증언
◯ 판소리 명창 오비취 딸 박옥희 증언
◯ 민요, 신민요 등의 명창 손금홍 딸 신성희 증언
유성기음반은 오래전에 녹음된 것이라 취입 시기, 녹음 장소, 반주자, 해당 곡목의 스승, 녹음 당시 사례금, 취입하게 된 사연 등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항들이 음반과 관련 가사지, 음반 광고지에 기록되지 못한 경우 이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취입 당사자들의 기억, 증언이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국악 유성기음반 관련 명인명창들의 주요 증언자료를 모으고 이 기억들을 실제 유성기음반과 비교 검증해 보고자 한다. 국악 유성기음반과 관련된 명인명창들의 증언자료 뒷부분에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국악인의 후손 증언자료도 참고로 정리해 놓았다.
그간 국악 유성기음반과 관련하여 명인명창들이 언급한 내용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검증되지 못하여 녹음 감상, 학술 면에서 활용이 잘 되지 못했다. 방송 녹음, 대담 테입, 문헌 기록, 관계인의 기억 속에 편린으로 흩어져 있는 국악 유성기음반 관련 명인명창의 주요 증언자료를 집대성하고 각기 고증하여 설명을 달아 놓았다.
이것이 국악 유성기음반을 보다 깊게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 보탬이 되길 바란다. 국악 유성기음반은 1896년~1960년대 초반에 제작되었다.(노재명 편저, 이즈뮤직·국악음반박물관 2000~2005년 발간, 국악 음반 사전 시리즈 총 7권 서적 참고)
이 해제 글은 2012년 9월 18일 작성 완료하였다.
◯ 가야금 명인 심상건 관련(국악학자 이보형 증언)
심상건은 가야금산조를 탈 때마다 고조를 다르게 하기로 유명한데 일동레코드에서 취입한 것은 어찌나 잘 되었던지 시골에서 제비표레코드로 심상건 가야금산조를 듣고 감탄, 심상건을 만나러 한 노인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러다 심상건이 직접 타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의 연주는 어찌나 잘못 되었던지 그 노인이 듣다가 그만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이보형, “우리나라 고음반 약사-흩어진 소리, 날아간 소리” [음악동아 1987년 6월호] 서울:동아일보사, 279쪽)
* 해제: 1925년 제비표조선레코드(일동레코드)에서 녹음한 심상건 가야금산조 유성기음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5
졔비標朝鮮레코-드 B41-A 伽倻琴散調(一) 긴양됴 沈相健
졔비標朝鮮레코-드 B41-B 伽倻琴散調(二) 긴양됴 沈相健
이보형 소장 유성기음반
졔비標朝鮮레코-드 B65-A 伽倻琴散調(三) (느신즁머리) 沈相健
졔비標朝鮮레코-드 B65-B 伽倻琴散調(四) (자신즁머리) 沈相健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997
졔비標朝鮮레코-드 B79-A 散調(五) (자진머리) 伽倻琴沈相健 長鼓韓成俊
졔비標朝鮮레코-드 B79-B 散調(六) (자진머리) 伽倻琴沈相健 長鼓韓成俊
이재성 소장 유성기음반
졔비標朝鮮레코-드 B132-A 伽倻琴散調 당학(上) 沈相健 鼓韓成俊
졔비標朝鮮레코-드 B132-B 伽倻琴散調 당학(下) 沈相健 鼓韓成俊
(1927년 7월 발매, 가야금:심상건, 장고:한성준)
◯ 판소리 명창 김초향 증언
(김초향은) 서울에만도 덩실한 집이 세 채나 있었고 대구에도 집이 있었다. 서른살에는 박록주, 오태석, 임방울과 함께 오사카에서 음반 취입을 하고 돌아왔다. 그의 남편이 된 김동강을 만난 때도 이즈음이었다.(설호정, “감은 눈가로 번지는 눈물-일흔 여덟살난 퇴기 초향의 삶” [뿌리깊은나무 1977년 3월호] 서울:뿌리깊은나무, 106∼107쪽)
* 해제: 이는 설호정이 김초향(1900~1980년 무렵)을 인터뷰하여 작성한 자료이다. 김초향은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1929·1930년), 빅타음반회사(1931·1936년), 뉴코리아음반회사·쇼지쿠음반회사(1936년), 오케이음반회사(1937년)에서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바 있다. 상기 인터뷰 자료에 기록된, 김초향이 30세 때 일본 오사카에서 취입했다는 유성기음반은 1929년에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녹음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판소리 명창 박록주 증언
장사훈(張師勛, 1916~1991년, 국악학자):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에, 오늘은 이 판소리 마지막 시간으로 으, 춘향가를 보내드리게 됐습니다. 근데 이번에는 참 우리나라 국창으로 모실 수 있는 그, 그 옛날 명창이신 박록주 여사를 모시게 됐습니다. 으, 청취자 여러분은 이 점 기대를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렇게 헤, 노래에, 방송꺼징 와 주셔셔. 에, 근데 저 이, 지금이 몇이신가요?
박록주(朴綠珠, 1905~1979년, 판소리 명창): 쉬흔 아홉입니다.
장사훈: 쉬흔 아홉이요? 참 연만하십니다. 근데 뭐, 소리하시는 데 좀 힘드시겠지요, 그래도?
박록주: 아 물론이지요. 나이 많으니까 힘이 안들겠습니까?
장사훈: 글쎄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르구 으, 어디 태생이신지 좀, 말씀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박록주: 경상북도 선산입니다.
장사훈: 예, 선산이요?
박록주: 네.
장사훈: 음, 그러면 또 한 말씀 드리겠는데 에, 누구한티 배우셨는지, 누구 문하생인지 좀 말씀 좀 해주세요.
박록주: 송만갑씨 하고.
장사훈: 예.
박록주: 정정렬씨 하고.
장사훈: 예.
박록주: 김창환씨 하고.
장사훈: 예, 이 세 분이요?
박록주: 네.
장사훈: 예, 그러면은 제가 또 말씀 드리겠는데 그 이 세 분이 다 우리나라 그 5대 명창 어, 참 마지막 판을 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다섯 명창 중에 한분인데요, 이 세 분이 다 그렇죠?
박록주: 네.
장사훈: 에, 그러면은 송만갑 선생한티서는 무슨 노래를 배셨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박록주: 송만갑 선생님한테는 흥부가, 심청가를 배우구요.
장사훈: 예, 또 정정렬 선생, 선생한테는요?
박록주: 정정렬씨한테는 춘향가 한 바탕을 배우구요.
장사훈: 예, 김창환 선생?
박록주: 김창환씨 선생님한테는 특히 <제비 노정기>를 잘하셔서 <제비 노정기>만 그 선생님한테 배웠습니다.
장사훈: 그렁개 저 흥부가 가운데 <제비 노정기>죠?
박록주: 네, 흥부가 가운데.
장사훈: 그렁개 그게 제가 다 달죠? 모도.
박록주: 네, 다 달습니다.
장사훈: 예, 요담 지금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요담에 다시 그 세 선생의 그 특징, 그것을 박 여사한티 말씀 드려 가지구 그 분의 특징이 어디 있나 요런 것도 저희가 한번 여쭤 보겠어요.
박록주: 네.
장사훈: 그니까 청취자도 그게 궁금할 거에요. 그럼 김창환 선생이던지, 송 선생이던지, 정정렬 선생 세 분이 어디 똑같은 노래를 하는데 뭐가 어떻게 다르냐. 이런 것을 우리가 설명만 해 가지구는 좀 부족하단 말씀이에요.
박록주: 네.
장사훈: 그래서 고 셋을 비교해서 요 다음 시간에, 요 다음 기회에 초큼씩만 요렇게 들려 주시면은.
박록주: 네.
장사훈: 청취자가 참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박록주: 네.
장사훈: 그러고 제가 기억하기도 그 취입된 것이 대단히 많다고 보는데요. 좀 거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까요?
박록주: 네.
장사훈: 그게 일제시대죠?
박록주: 네, 일제시댑니다. 빅타레코드.
장사훈: 네, 빅타하고요.
박록주: 콜럼비아하고
장사훈: 콜럼비아하고
박록주: 오케.
장사훈: 오케.
박록주: 태평.
장사훈: 태평.
박록주: 그 후에도 또 있어요.
장사훈: 또 있지요. 제 기억에도 더 있는 것 같애요.
박록주: 네, 그 후엔 잘 모르겠습니다.
장사훈: 그러니까 그 때 녹음 느신 것은 저 열 아홉장으로 된 거1> 있고 스무장으로 된 거2> 있죠?
박록주: 네.
장사훈: 어, 춘향가 전판도 있고 그런데 그 때는 송만갑 선생, 정정렬 선생, 김창환 선생은 없었지요?3>
박록주: 네.
장사훈: 아 그리고 이화중선씨...
박록주: 네.
장사훈: 있었고.
박록주: 네.
장사훈: 그러구 박 여사 계시고.
박록주: 네.
장사훈: 음, 그러구 젊은 사람으로는? 요새 산 사람으로.
박록주: 젊은 사램으로는 지금 김소희.
장사훈: 김소희씨요 네, 네. 에, 아주 지금도 그 판이 귀중판으로 돼 있습니다.
박록주: 네.
장사훈: 오늘 춘향가 두 번째 시간입니다. 박 여사 오늘 또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근데 저, 한마디 말씀 여쭤 보겠는데요 어, 판소(리), 지금 쉬흔 아홉이시라고 그랬죠?
박록주: 네.
장사훈: 그러구 레코드 취입할 적에, 옛날 이런 얘기하면 좀 실례가 될지 몰라도요, 지금 살아 계십니다만은 이진홍씨요.
박록주: 네.
장사훈: 아주 경서도의 명창 아닙니까?
박록주: 네.
장사훈: 이진홍씨 얘기를 들으니깐은 그 동경 가서 레콧 취입을 처음 하고 나서 그 자기 목소리가 튀어 나오는 걸 듣구 엉엉 울었다고 그래요.
박록주: 흐허허.
장사훈: 뭐 감격하구 또 놀라웁고 그래서 울었다구 하는데 그럼 박 여사는 어땠어요?
박록주: 그런 생각은 안했지만은 나는 원래 레콧드 취입을 서울서 처음 먼첨 했습니다.
장사훈: 예예, 서울서요?
박록주: 예예, 그 때는 저 컬럼비아의 여 지국에서 널 때 그 때는 나팔통으로.4>
장사훈: 예, 예 나팔통으로.
박록주: 벽에다 꼽아 놓고서는, 둘이 볼을 한테 대고 비비면서 넣을 땐데.
장사훈: 하하, 그러세요? 예.
박록주: 그 때 김해 록주,5> 송 감찰 송만갑씨 그렇게 옇을 때, 그 때는 내가 축음기를 안옇을라구 했습니다.
장사훈: 왜요?
박록주: 왜 그런 생각을 가졌는가 항깨는 내 자식이 나면은 내 소릴 듣고 혹 어쩔까 하는 생각에 안옇을라 했는데 쏙아서 가서 내가 총독이 듣는다 카고 쏙아서 가서 한번 옇은 일이 있습니다.
장사훈: 아, 그러세요?
박록주: 네.
장사훈: 그 땐 거 참 우스운 얘기 많죠? 저 이 방송국이 처음 생기문 이 마이크가 꼭 저 뱀 대가리 같잖아요?
박록주: 네.
장사훈: 아 그래 이 방송하지 말라구 생 야단들이 나고 그 때는.
박록주: 네.
장사훈: 아 나두 뭐 그 때 얘기를 들었지만도 아주 저 이 방송국 나가문은 사람 버린다구.
박록주: 네.
장사훈: 그래 난 난봉이 나서 버리나 그랬드니 그게 아니고 이 마이크 앞에 스면은 이 저 이 뱀 대가리 같은 놈이 혼을 다 빼 간다구 그래서 그 때는 방송도 부모들이 말리고 그랬던 모양이에요. 역시 참 옛날은 재밌는 얘기가 많습니다.
장사훈: 춘향가 세 번째 시간입니다. 에, 오늘 좀, 저 좀, 말씀하시기 좀 힘드실 것 같은데 그러나 좀 여쭤 보겠습니다. 그 고수요.
박록주: 예.
장사훈: 예전부터 일고수 이명창이라고 했는데 그 고수가 북을 잘 쳐주문 소리가 잘 된다고 그게 무슨 얘깁니까?
박록주: 네.
장사훈: 고수가 소리를 따라가는 건지, 그걸 소리하는 사람을 잘 맞춰 주는 건지. 요, 요새는 보통들 뭐 장단이 삔다, 뭐 어쩌고 하고는 그저 또박또박 쳐 나가는 것만 요새는 세우는 것 같은데 난 소리라는 건 또박또박 한다는 건 예술성이 부족하다구 보는데. 에, 그건 제 의견입니다만은 좀 한성준씨가 어떻게 해서 좋은 고수냐, 그런 말씀을 좀 해주세요.
박록주: 그러니까 역시 말을 허자면 소리하는 사램이 다 제 각기 그 모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장사훈: 예.
박록주: 그래서
장사훈: 예, 소리하는 사람이요?
박록주: 네. 고수가. 고수가 소리를 보필해서 잘 따르는 걸 좋아하는 사램이 있구.
장사훈: 아하.
박록주: 또 소리가 고수를 따라가는 수두 있는데
장사훈: 예.
박록주: 역시 말하자면은 고수가 소리를 따라서 보필을 잘 해야겠죠.
장사훈: 그렇죠? 소리가 고수 따라갈 수는 없죠.
박록주: 예, 그런데 한성준씨는 특히 그 냥반이 말하자면 장단 그저 한나 하나에 이 소리하는 정도가 그저 신명이 나고 그저 소리 사설도 저대로, 지대루 나올 정도의 이 만한 북이 됩니다.
장사훈: 그러면 그 저, 정원섭씨두 잘 쳤다구 그러는데 어떻습니까? 한성준씨하구.
박록주: 정원섭씨가 한성준씨를 못따라갑니다.
장사훈: 역시 못따라가죠?
박록주: 예. 못따라가지만은 그 냥반도 잘 쳤습니다.
장사훈: 지금은 그런 분도 없지요?
박록주: 예, 그런 분도 없습니다.
장사훈: 예, 그 정정렬씨 뭐 아우 되시는 분이라고 그랬죠?
박록주: 예, 예.
장사훈: 그러면 이분도 소리를 원래 하셨나요?
박록주: 소리는 몬합니다.
장사훈: 아하.
박록주: 그저 악이나.
장사훈: 예, 예. 그러면 이 <사랑가>는 누가 잘 불렀어요?
박록주: <사랑가>는 여자로서 김해 록주가 잘 불렀다고 봐야죠.
장사훈: 아예, 김해 태생의 록주씨요?
박록주: 예.
장사훈: 김록주씨지요?
박록주: 예.
장사훈: 에, 그 분이 <사랑가>를 잘 불렀어요?
박록주: 예.
장사훈: 그러고 뭐 <죽장망혜>도 잘 불르고?
박록주: 예.
장사훈: 뭐 단가의 <불수빈>도 잘 불르고 그랬다구요? 일찍 돌아갔지요?
박록주: 예, 일찍 돌아갔습니다.
장사훈: 서른 여섯, 일곱에 돌아갔다고 하니깐. 그러구 저 여류 명창으로서 그 이화중씨는, 이화중선씨요. 세상에서 지금 다 알고 있는데 아마 일반 대중은 김록주씨보담도 이화중선씨를 더 잘 알 거에요.
박록주: 그렇죠.
장사훈: 그게 레콧드 관계죠?
박록주: 예.
장사훈: 근데 그 분(이화중선)이나 김초향씨보다 어때요?
박록주: (김해 김록주가) 김초향씨보단 좀 낫죠. 하지만 목이 천생입니다 화중선씨는.
장사훈: 아하, 예.
박록주: 그래서 이 판소리는 (김해 김록주가 이화중선의) 계면 옥조를 못당하시는데
장사훈: 아하.
박록주: 김해 록주씨는 이 축음기를 못옇고 돌아가셨습니다. 저.
장사훈: 예예, 그렇죠.
박록주: 벽에다 놓고 불르는 나팔통에 한번 옇고6> 돌아가셨으니깐 축음기에 소리 못옇었습니다.
장사훈: 아하, 그래서 축음기 관계로 이화중선씨가 더 이름이 나고 김록주씨는 뭐 거의 뭐 전문가 아니면 잊어 버리다시피 하고 좀 애석헙니다.(1963년 KBS 녹음. KBS 방송자료실 소장 디지털오디오테입 관리번호 5845-00241~00250, 10DAT, 박록주 춘향가 1~5, 2세트 수록 음원. 1963년 원본 모노 녹음→1975년 11월 28일 KBS 1차 복사본 제작→1993년 3월 26일 KBS 2차 복사본 제작→2004년 12월 9일 국악음반박물관 재복사본 소장.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컴팩트디스크 관리번호 MICD-2784~2788, 5CD. 박록주 명창의 이 1963년 방송 자료는 지금까지 발견된 음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판소리 명창 인터뷰 녹음이라고 판단됨. 노재명 채록)
양반 상인(常人)을 따지면 나(박록주, 본명:박명이, 아호:春眉, 경북 선산 출생, 1905~1979년)는 서슴지 않고 소리하는 내가 무슨 양반인가 하고 대답한다. 따라서 내 소리를 레코드에 취입해서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마음이 일체 없었다. 그래서 레코드회사서 녹음을 요청해 오면 단연코 거절을 했다.
20살의 가을께로 기억된다. 한남권번에 있는 金씨가 찾아와 총독이 소리를 듣자고 하니 가자는 것이었다.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총독부(지금 중앙청)로 가는 게 아니라 차가 가는 방향이 진고개였다. 좀 이상하다 하면서 들어갔더니 조그마한 방에 스승인 송만갑 선생과 金海의 명창인 김녹주(金綠珠)가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나팔통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아마 이것을 통해서 총독이 노래를 듣는가 보다 했다. 나도 그를 따라 단가 <죽장망혜>와 <화초 사거리>(花草 四距里)를 불렀다.
소리가 끝나자 그제서야 그들은 유성기에 녹음한 것이라고 알려줬다. 나는 깜짝 놀라 펄펄 뛰며 취입한 것을 지워 달라고 했다. 그러나 노래는 지우지도 않고 그대로 시판됐으며 나는 취입료도 받지 못했다.
처음 유성기에 나오는 내 소리를 듣고 나는 저게 내 소리인가 하고 의심을 했다. 목소리가 내 생각과는 영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후 자꾸 들을수록 그렇게 나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해 가을에 또 레코드 녹음하러 이번엔 일본으로 갔다. 일본 콜롬비아레코드회사의 초청이었다.
일행은 임방울, 김초향(金楚香), 가야금으로 유명한 오태석(吳太石), 이름을 잊은 진주 기생과 나의 5명이었다. 그때 임방울(1905~1962)을 처음 만났다. 나와 동갑인 그는 콜롬비아레코드사가 발굴한 신인이었다. 그는 고향 전남 광산(光山)서 직접 부산으로 와서 우리와 합류했다. 두루마기 입은 모습이 어찌나 촌티가 나는지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그는 5대 명창인 유성준(劉聖俊) 선생한테서 소리를 배웠는데 천생의 미성(美聲)이었다. 그러면서도 성량(聲量)이 풍부해서 판소리를 잘했다. 이점은 너무나 미성이어서 판소리에는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은 이화중선(李花中仙)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오사까의 콜롬비아레코드회사에 가서 취입한 노래 중 춘향가 옥중가의 쑥대머리로 일약 명창의 칭호를 얻었다. “쑥대머리 귀신 얼굴 적막옥방(寂寞獄房) 찬자리에 생각나는 것이 임뿐이라”의 이 소리는 임방울이 지닌 천구성(天口聲)을 그대로 드러나게 해줬다.
나는 단가 <죽장망혜>와 심청가 중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 등 10곡을 취입했다. 내가 취입한 소리도 크게 히트했다. 우리는 오사까역 앞에 있는 스테이션호텔에 머물면서 10일 동안 취입을 했다. 그동안 그들의 대접은 극진한 것이었다. 체재비 등 일체의 비용은 물론 1곡당 1백원의 많은 취입료를 줬다. 모두가 10곡씩 취입을 했다.
그때 새롭게 느낀 점은 그들은 무턱대고 취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습니까?”하고 묻곤 했다. 기분이 좋다고 하면 그때야 취입에 들어갔다. 만일 비위에 거슬리는 경우가 있으면 계속 “기분이 좋지 않다”면서 골탕을 먹일 수도 있었다. 그때 레코드는 1면(面)이 3분짜리여서 사실 한판을 취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척 신중하게 레코드 취입을 했다.
사례로 받은 1천원의 돈은 무척 큰 돈이었다. 무엇을 할까 궁리하다 나는 元山 안변(安邊) 들의 제일 좋은 논을 샀다. 20마지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한 마지기에 어느 정도의 추수가 됐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1년에 20가마의 쌀을 가져 오곤 했다. 그 논은 6.25 때 잃어 버렸지만 지금도 내 장롱 깊숙이에 논 문서가 보관돼 있다. 통일이 되면 그 논을 찾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저 서운해서 보관할 따름이다.(박록주가 일본 오사까 콜럼비아음반회사에 유성기음반을 취입하러 갔을 때 호텔 정원에서 기념 촬영한 박록주 흑백사진이 이 신문기사에 실려있음)
스물 두 살이던 1926년 가을 나는 두 번째로 일본 오사까에 있는 오케레코드회사에 취입하러 갔다. 이때의 일행은 6.25 때 월북한 신불출, 창(唱)으로는 박중근씨와 서도(西道) 소리를 잘하는 朴모씨, 가야금의 김종기씨, 신파 연극 배우인 신은봉씨, 조선극장 변사인 金모씨 등 복잡한 인원 구성이었다.
신불출은 만담을 취입했고 연극 배우 신은봉도 변사 김씨와 함께 신파 연극을 레코드에 담았다. 그때 변사가 우리와 함께 간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오케레코드회사가 착안해낸 이 기발한 방법은 소리를 하는 도중 변사가 사이에 아니리를 넣는 식으로 소리를 소개했다.
즉, “그때 심청이는 몸이 팔려 선인(船人)들에 붙잡혀 인당수에 죽으러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하면 이어서 나는 심청이 빠져 죽는 대목을 불렀다. 변사를 창(唱)에 도입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이때의 金변사는 당시 서울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름은 잊었으나 중키에 목소리가 좋고 야무지게 생겼었다. 그때 인사동에 있던 조선극장의 변사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취입한 10곡의 소리 가운데는 김창환(金昌煥) 선생이 가르쳐준 흥보가(興甫歌) 중 <제비노정기(路程記)>도 들어있었다. 원래 흥보가라면 송만갑(宋萬甲) 선생이 으뜸이지만 이 노정기만은 김 선생을 당할 자가 없었다.
김창환 선생이 이 노정가와 춘향가 중 이도령 과거 보는 대목이 일품이라고 해서 22살 되던 봄에 수운동 댁으로 배우러 갔다. 선생은 그 무렵 이미 칠순(七旬)이 넘은 고령이라 별로 창도 안했으며 기억도 흐려서 배우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어디 초청받아 갔을 때는 제대로 부르지만 나한테 가르쳐줄 때는 신경을 안쓴 때문인지 가사의 앞과 뒤를 구분하지 않은 채 마구 알려줬다.
나중 소리하는 데 따라가서 보면 앞의 말이 뒤에 붙여져 있고 뒤에 붙일 말을 훨씬 앞에 알려준 것을 알고 고치곤 했다. 선생은 원래가 미남으로 그때도 얼굴이 뽀얗게 예뻤다. 시골에 내려가면 명창이라고 않고 어느 대감이 온 듯 하다고 했다.
오사까 취입 때 같이 갔던 김종기란 사람은 나와 동갑으로 기가 막힐 정도로 가야금을 잘 탔다. 얼굴도 미남이요 재치가 있어서 훗날 크게 되리라고 했으나 곧 위암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부터 나는 수시로 일본에 드나들며 레코드 취입을 했다. 23살 봄에는 정정렬(丁貞烈) 선생과 같이 도꾜의 빅터레코드회사에 취입하러 가기도 했다. 이어 태평레코드에도 취입을 했다.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일정 때 레코드 취입 등에서 애로를 겪은 게 한두건이 아니다. 그것은 고유한 우리 노래가 일본 당국에 의해 애매하게 금지곡으로 낙인 찍혀 부를 수 없던 일들이다. 22살 가을 오케레코드회사서 취입할 때도 나는 <운담풍경>을 부르려 했으나 회사 측서 반대했다. <운담풍경>의 사설 가운데는 <진국명산>과 마찬가지로 임금의 천수(天壽)를 축하하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그 가사 내용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못 부르게 된 것은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간 한국 사람이 그 가사 내용을 일본인들에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소리 가운데 못 부르게 된 대목은 춘향가가 가장 많았다. 서울을 경성(京城)이라고 했기 때문에 한양(漢陽)이란 말은 절대 쓰지 못하게 했다.
춘향가의 이별가 중에 “한양 천리 먼먼 길에 부디 평안히 잘 가시요”를 “여보 도련님 먼먼 길에”로 고쳐 불러야 했다. 물론 “경성 천리”라고 하면 괜찮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방자가 춘향의 편지 갖고 가는 대목 중의 “어이 가리. 어이 가리. 한양 천리를 어이 가리”도 “어이 가리. 어이 가리. 삼청동을 어이 가리”로 바꿨다.
특히 춘향이 매를 맞고 죽은 듯 실신해 있을 때 행수 기생이 춤 추며 소리하는 대목은 아예 부를 수가 없었다. “어서 죽어라. 어서 죽어” 하면서 시작되는 이 가사는 “진주 촉석루 논개씨는 왜장 청정(淸正:史實과는 잘못된 것임)의 목을 안고 남강(南江) 물에서 죽었고 평양 기생 계월향은 임진에 의사(義死)하여 의열사에 모셨고 안동 기생 일점홍은 산열녀문을 세웠으니 우리 남원 교방청에 춘향 같은 열녀가 있어” 하며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일본인들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용납 못할 가사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나마도 다행이었다. 일정 말기에는 판소리를 일본말로 부르라고 강요했다. 만일 조금만 더 일정이 계속됐다면 춘향 아씨를 ‘슝꼬상’이라고 부를 뻔했었다.(박록주가 박중근 명창 등과 함께 오케레코드회사에 유성기음반을 취입하러 갔을 때의 기념 단체 흑백사진이 이 신문기사에 실려있음)
김종익씨는 참 폭이 넓은 분이었다. 그분은 늘 “너의 몸은 내 것이지만 소리는 세상 사람들 것이니 그들에게 들려줘야 한다”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방송에 나가는 것, 레코드 취입하는 것, 성악연구회서 창극하는 것 세가지만은 허락해 준다고 했다. 이때부터 초청받아 소리하는 데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1932년부터 수 년간은 아주 조용한 생활을 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21살 때의 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다. 지금 들어서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소리는 서른이 되었을 때의 창(唱)이다. 즉, 적어도 20년 정도의 소리를 해야 부끄럽지 않은 소리가 나오는 것 같다. 서른이 넘었을 때는 이제 창을 소화하면서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기교가 목청을 이기고 넘는 시기는 40을 지나서다. 아마 일평생 가장 좋은 소리를 낸 것은 40대 후반서 50대 전반께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내 성질과는 달리 예전부터 뭔가 모으기를 잘했다. 그 덕분에 옛날의 사진과 소리를 녹음해 놓은 게 상당히 있다. 가끔 송만갑 선생이나 이동백 선생의 소리를 들어보면 뭔가 새로운 각오가 선다.
그 연로(年老)한 분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피가 맺힌 듯 울려 나오는 것을 보면 바로 저분들이야말로 명창(名唱)이란 칭호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춘향가 가운데 이동백 선생의 월매(月梅) 창, 송만갑 선생의 적벽가 중 호령소리 그것 한 대목만 들어도 예술의 깊은 경지를 새삼 느끼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분들의 소리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섞갈리고 옛 사람에 죄스러워 얼굴이 달아 오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박록주, “나의 이력서 11·13·20·30·38” [1974년 1월 22·24일자, 1974년 2월 2·16·28일자 한국일보])
“어제 저녁에 네가 천향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다. 만일 그때에 만났으면 너를 죽였을 것이다.” 김유정은 이런 내용의 혈서를 서슴없이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나는 그때마다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아 한참을 떨곤 했다. 김유정의 눈을 피하려고 인력거에 휘장을 내리고 남바위를 푹 눌러 쓰고서야 외출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때에 레코드 취입을 하러 자주 일본에 드나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노래를 못부르게 하려고 갖은 트집을 다 잡았다. 소리 가운데에 못 부르게 된 대목은 춘향가가 가장 많았다. <이별가> 중에 “한양 천리 먼먼 길에 부디 평안히 잘 가시오”를 “여보 도련님 먼먼 길에”라고 고쳐 불렀고 “어이 가리. 어이 가리. 한양 천리를 어이 가리”도 “삼청동을 어이 가리”로 바꿔 불렀다. 송만갑 선생이 지은 <진국명산>이나 <운담풍경>의 사설 가운데는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대목이 있다고 하여 아예 못 부르게 했다.
나는 레코드를 취입하러 갈 때면 이따금 신씨와 동행을 했다. 한번은 그 사람의 권유로 일본에서 ‘킹콩’이라는 영화를 사가지고 왔다. 킹콩이란 팔 하나가 집채 만한 큰 고릴란데 그 놈이 등장하는 재미있는 영화였다. 그때에 나는 레코드 취입료를 한곡에 백원씩 받았는데 열곡을 취입하여 모두 천원을 받았다. 그 돈 중에서 칠백원을 주고 영화를 사왔다.
서울로 돌아와 신씨가 있던 조선극장에서 ‘킹콩’을 돌렸다. 그러나 때마침 조선극장의 변사 하나가 총독부의 어떤 관리를 험담하고 돌아다니다가 무고죄로 걸려들었다. 변사가 갇히자 지배인 신씨도 함께 취조를 받으러 들어갔다. 얼마 뒤에 신씨는 풀려 나왔지만 변사는 육개월인가를 징역을 살았다. 이런 일 때문에 ‘킹콩’이란 영화가 잘 팔리는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영화로 큰 손해만 보고 말았다.(박록주, “털어 놓고 하는 말 -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 [뿌리깊은나무 1976년 6월호] 서울:뿌리깊은나무, 153~154쪽)
박록주가 유성기음반에 남긴 단가 <대관강산>은 박록주가 박기홍 문하에서 배웠다고 한다.(국악학자 이보형이 예전에 박록주 명창과 대담시 들은 이러한 사실을 노재명에게 알려준 내용 정리)
판소리 명창 박녹주가 아주 젊어서 축음기에 취입한 곡은 김녹주와 병창으로 박은 <화초 사거리>이다. 그런데 그 나팔통 기계가 성능이 좋지 않아 나팔통에 입을 가까이 대고 취입하지 않으면 녹음이 안되었기 때문에 박녹주와 김녹주는 서로 볼을 대고 나팔통에 가까이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김녹주는 노래를 부를 때 고개짓을 많이 하는 버릇이 있었다. 김녹주는 평소 버릇대로 어찌나 고개짓을 많이 하였던지 서로 볼을 비비대며 취입하고 나자 박녹주의 볼이 화끈거리며 벌겋게 달아 올랐다고 한다. 김녹주와 같이 불렀다는 <화초 사거리> 음반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국악학자 이보형이 박록주 명창을 인터뷰한 내용 정리. 이보형, “우리나라 고음반 약사-흩어진 소리, 날아간 소리” [음악동아 1987년 6월호] 서울:동아일보사, 278쪽)
박록주에 의하면 일정 때 정정렬, 김초향, 박록주와 같은 판소리 명창과 젓대 명인 박종기가 고니타령을 짜서 음반에 취입한 일이 있었다 한다. 고니가 우는 것을 메나리조로 우는데, 김초향이 메나리조로 우는 소리를 못하여 박록주가 대신 메나리조로 우는 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로 봐서 봉장취를 고니 이야기로 엮는 것이 근년에 꾸며진 것은 아닌 것 같다.(1970년대 초반 박록주 증언 내용. 이보형, “봉장취의 淵源과 變遷考” [한국음반학 제10호] 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11쪽)
* 해제: 상기 증언 가운데 박록주가 녹음하는지 모르고 난생 처음으로 나팔통에 대고 소리를 하여 취입이 되었다는 유성기음반은 1926년 일동음반회사(제비표조선레코드) 녹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후 박록주가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 같이 녹음하러 간 임방울 명창과 1905년 출생 동갑이라고 한 것은 중요한 증언자료이다. 임방울 명창은 흔히 1904년 생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상기 기록 중에서 임방울 명창이 1962년에 작고했다는 신문의 인쇄는 오류이고 임방울은 실제는 1961년에 별세하였다.
박록주는 일본 빅타, 폴리도르, 오케이, 시에론, 다이헤이, 뉴코리아, 쇼지쿠, 기린, 고라이 음반회사에서도 유성기음반을 녹음한 바 있다. 상기 박록주 증언 중에서 유성기음반 취입 시기는 실제와 차이가 있다. 상기 박록주 증언 가운데 박록주가 판소리 창을 하고 변사는 아니리를 하여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바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박록주는 김씨였던 변사 이름이 기억 안난다고 하였다. 이 변사는 김영환인 것으로 보인다.
상기 박록주 증언 중에서 박록주가 오케이음반회사에 박중근 명창 등과 함께 취입하러 간 사연과 해당 자료에 같이 실린 녹음 기념 단체사진이 매우 귀중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일제 때 일본인들이 판소리 가사를 검열하고 규제했으며 판소리를 일본말로 바꿔 부르게 했다는 박록주의 증언도 주목되는데 이는 정광수, 박동진 명창 등도 회고담을 들려준 바 있다.
박록주는 공연, 방송, 음반 취입, 후원금 등으로 많은 돈을 받았지만 말년에 경제고에 시달렸다. 상기 박록주 증언에 음반 취입료 상당수를 잃게 된 사연이 일부 들어있다.
박록주의 증언 가운데 “송만갑 선생이 지은 <진국명산>”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송만갑이 단가 <진국명산>을 작곡했다는 의미로 판단되며 매우 귀중한 증언 내용이다. 송만갑은 일축조선소리반,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 일본 빅타음반회사유성기음반에 이 단가를 총 3번 취입한 바 있다.
상기 자료에는 영화광이기도 했던 박록주가 일본에서 유성기음반 녹음을 마치고 취입 사례금으로 영화를 매입하여 한국에서 상영하게 된 사연 등 박록주 명창의 유성기음반 취입 관련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증언이 담겨있다.
이보형의 상기와 같은 박록주 대담 자료에 의해서 박록주 단가 <대관강산>이 박기홍한테 사사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박록주는 1929년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 1930년 일본 빅타음반회사, 1933년 오케이음반회사, 1934년 다이헤이음반회사에서 단가 <대관강산> 유성기음반을 녹음하였다.
상기 자료에 언급된 김록주, 박록주 명창이 함께 부른 <화초 사거리>는 1926년에 일동음반회사(제비표조선레코드)에서 녹음된 유성기음반인데 아직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다.(졔비標朝鮮레코-드 B135)
1970년대 초반 박록주가 이보형에게 증언한 김초향, 박록주 취입 봉장취 녹음은 1936년에 제작된 다음과 같은 유성기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반주를 코리아악단이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자세한 연주자 이름이 안적혀 있는데 상기와 같은 박록주 증언에 의해서 대금은 박종기가 반주했음이 밝혀졌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0382
New Korea 1042 雜歌 꾀꼬리 金楚香 伴奏-코리아樂團
New Korea 1042 雜歌 고늬한쌍 朴綠珠 伴奏-코리아樂團
◯ 판소리 명창 정광수 증언
나(정광수, 1909~2003년)는 20대에 빅타 음반회사에서 나의 첫 음반을 취입했다. 나는 당시 장흥에 있는 삼성암에서 판소리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빅타 회사로부터 음반 취입 제의를 받고 서울로 갔다. 서울로 가는 길에 충청도에 있는 현암사에서 김연수씨를 만나 함께 음반을 취입하러 빅타 회사로 갔다.
빅타 회사에서는 나, 김연수씨, 김옥련씨에게 8장의 유성기음반에 입체창으로 수궁가를 취입해 달라고 하였다. 김연수씨는 8장에 수궁가를 담아내기가 힘들다며 거절하였고 그래서 입체창 수궁가 취입은 무산되었다. 빅타 회사에서는 내게 서울까지 오느라 고생했으니 독집 음반이라도 취입하고 가라 하여 유성기음반 한 장을 취입했다. 김옥련씨는 김연수 명창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운 사람이다.
내가 빅타에서 취입한 것은 적벽가 중 <새타령>과 <오림 자룡 출현>이다. 북반주는 한성준 선생님이 맡았다.
녹음한 곳은 서울에 있던 빅타 음반회사의 녹음실이었다. 난생 처음 음반을 취입하다 보니 긴장하여 <새타령> 끝부분을 부르다가 사설을 더듬어서 <새타령>을 다시 취입하였다. 한성준 선생님은 처음 취입된 <새타령>이 좋았는데 아깝게 됐다고 하였다.
빅타 회사에서 취입한 나의 첫 독집 음반은 소리가 설익어서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러웠다. 내가 빅타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할 당시 빅타 문예부장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유 부장’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내가 빅타 회사에서 취입한 적벽가는 유성준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다. 나는 빅타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하고 다시 장흥으로 가서 판소리 공부에 주력했다. 내가 빅타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하긴 했지만 음반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못보았다.(1991.2.12.19:00~19:20, 1993.8.6.15:30~15:40, 1995.9.14.20:00~22:30, 1995.12.13.18:20~18:40. 노재명이 정광수 명창을 인터뷰한 내용 정리)
* 해제: 정광수 명창의 유성기음반 취입 사연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증언자료이다. 이 정광수 명창의 증언에 의해서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취입한 정광수 적벽가 유성기음반이 유성준제라는 것이 명확히 입증되었다. 이 녹음은 정광수가 유성준 문하에서 적벽가를 배운지 얼마 안돼서 취입한 것이고 오늘날 전승이 위태로운 유성준제 적벽가의 중요한 음원이라 하겠다. 정광수는 20대 때 이 유성기음반을 취입했다고 기억하였으나 이 유성기원반 표면 기록에 의하면 1939년 6월 23일 녹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제는 정광수 나이 31세 때 녹음된 것이다.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제작된 정광수 명창의 유성기음반 목록은 다음과 같다.7>
서울 MBC 문화방송 레코드실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SP00112
Victor KJ-1351(KRE542) 赤壁歌 烏林에子龍出現(上) 丁珖秀 鼓韓成俊
Victor KJ-1351(KRE543) 赤壁歌 烏林에子龍出現(下) 丁珖秀 鼓韓成俊
◯ 해금, 정가, 전통춤 명인 김천흥 증언
김천흥(金千興, 1909~2007년)이 이왕직아악부를 졸업한 직후 1928년에 이왕직아악부 ‘시노다’라는 이가 아악을 유성기음반에 녹음해야 된다고 해서 삼환기업 자리에 있던 이왕직아악부 한옥에서 김천흥을 비롯한 이왕직아악부 연주자들이 아악 거의 전부를 녹음하였다. 함화진이 그 가운데 잘못된 건 제외하고 몇가지를 골라서 일본 빅타 음반회사를 통해 음반으로 출반하였고 대한국악원에 그 음반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부산 피난 와중에 분실되고 말았다.(1997.5.16.10:30~15:30.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국립국악원 내 국악박물관 건물 304호 원로사범실, 1997.7.8.15:25~15:35,15:40~15:50.국립국악원 내 국악박물관 건물 304호 원로사범실, 1997.8.4.21:00~21:15.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임광아파트 김천흥 자택, 1997.8.28.17:15~17:20.국립국악원 내 국악박물관 건물 304호 원로사범실에서 노재명이 김천흥 명인을 인터뷰한 내용 정리)
* 해제: 이왕직아악부 유성기음반 취입 계기와 출반 과정, 녹음 장소에 대한 귀중한 증언 내용이다. 1929년 일본 빅타음반회사에서 취입한 이왕직아악부 유성기음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1876
Victor 49801-A 祭禮樂 保太平之樂 (合)熙文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金영濟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37
Victor 49815-B(49801-A) 祭禮樂 保太平之樂 (合)熙文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金영濟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76
Victor 49801-B 宴禮樂 表正萬方之曲 (管)上靈山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38
Victor 49816-A(49801-B) 宴禮樂 表正萬方之曲 (管)上靈山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2-A 祭禮樂 凝安之樂 (合)黃鍾宮·仲呂宮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金영濟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2-B 宴禮樂 咸寧之曲 (管)三絃還入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3-A 宴禮樂 萬年長歡之曲 (管)界樂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3-B 宴禮樂 醉太平之曲 (大笒獨奏)平調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39
Victor 49817-A(49803-B) 宴禮樂 醉太平之曲 (大笒獨奏)平調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4-A 宴禮樂 長春不老之曲 (合)步虛子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40
Victor 49818-B(49804-A) 宴禮樂 長春不老之曲 (合)步虛子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4-B 宴禮樂 堯天舜日之曲 (細)淸聲還入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39
Victor 49817-B(49804-B) 宴禮樂 堯天舜日之曲 (細)淸聲還入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5-A 宴禮樂 萬波停息之曲 (管)吹打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41
Victor 49819-B(49805-A) 宴禮樂 萬波停息之曲 (管)吹打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5-B 宴禮樂 萬年長歡之曲 (歌)編樂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42
Victor 49820-A(49805-B) 宴禮樂 萬年長歡之曲 (歌)編樂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6-A 宴禮樂 萬年長歡之曲 (歌)編數大葉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42
Victor 49820-B(49806-A) 宴禮樂 萬年長歡之曲 (歌)編數大葉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7
Victor 49806-B 宴禮樂 頌九如之曲 (管)還入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07-A 宴禮樂 壽齊天 (管)井邑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40
Victor 49818-A(49807-A) 宴禮樂 壽齊天 (管)井邑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07-B 宴禮樂 堯天舜日之曲 (細)平弄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37
Victor 49815-A(49808-A) 祭禮樂 定大業之樂 (合)篤慶 濯征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金영濟
Victor 49808-B 宴禮樂 萬年長歡之曲 (歌)言弄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09-A 祭禮樂 保太平之樂 (合)基命 歸仁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金영濟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09-B 宴禮樂 萬年長歡之曲 (歌)言樂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10-A 宴禮樂 重光之曲 (絃)細靈山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38
Victor 49816-B(49810-A) 宴禮樂 重光之曲 (絃)細靈山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11-A 宴禮樂 豊慶之曲 (管)別羽打令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11-B 宴禮樂 萬年長歡之曲 (歌)言編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12-A 宴禮樂 瑞日和之曲 (合)解令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SP-1841
Victor 49819-A(49812-A) 宴禮樂 瑞日和之曲 (合)解令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12-B 宴禮樂 萬波停息之曲 (管)吹打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13-A 宴禮樂 太平春之曲 (合)本令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158
Victor 49813-B 宴禮樂 萬年長歡之曲 (管)界樂 朝鮮李王職雅樂部 指揮咸和鎭
◯ 가야금 명인 김죽파와 그의 여동생 판소리 명창 김은희 증언
[1986년 8월 22일 김죽파 증언 녹음 카세트테입 A면]
문재숙: 공부 끝나고도 한성기씨를 만나신 적이 있으셨어요?
김죽파(金竹坡, 본관:金海, 본명:金蘭草, 예명:雲仙, 1911∼1989년, 전라남도 영암 출생): 서울 와서 한번 만났지.
문재숙: 레코드사 취입할 때요?
김죽파: 아니. 그 전에 우리 집에 한번 찾아왔었어.
문재숙: 선생님(김죽파) 결혼하시고?
김죽파: 응.
문재숙: 몇 세에요? 선생님(김죽파) 한 삼~사십세.
김죽파: 삼십 됐을거야.
[1986년 9월 6일 김죽파와 그의 여동생 김은희 증언 녹음 카세트테입 A면]
문재숙: 공부 끝나고도 한성기씨를 만나신 적이 있으셨어요?
김은희(1917년 출생, 김죽파 여동생, 판소리 명창, 정정렬 문하에서 판소리 사사, 14세 때 혼인과 함께 국악계 떠남): 봉술(박봉술)이 소리를 들어보고 만갑(송만갑)이 소리 옛날 판을 딱 시켜보면요 그 소리를 얼매나 수정했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요건(박봉술은) 목이 궂응게 그러지 소리야 잘 갖고 나가지.
문재숙: 누가요?
김죽파: 박봉술이.
김은희: 지금 현재사(?) 그 나이 치구는 그 만치 허는 사람 없어요.
김죽파: 없지.
[1986년 9월 6일 김죽파와 그의 여동생 김은희 증언 녹음 카세트테입 B면]
문재숙: 선생님. 그 임방울씨가 일본에 대판으로 공연도 다니고 예전에는 일본으로 공연을 많이...
김은희: 취입하러 제일 많이 갔지, 취입하러. 지금 향사(박귀희)한테가 임 선생(임방울) 소리가 전부 다 있다는데 한번 들어봤으믄 좋겠어.
[1987년 4월 10일 김죽파와 그의 여동생 김은희 증언 녹음 카세트테입 A면]
문재숙: 옛날에 녹음하셨어요? <명기 명창>도요?
김죽파: 했었어.
문재숙: 근데 그거 없어요?
김죽파: 아 저, 뭐야, 레코드에 넣었어 그걸. 젊었을 때.
문재숙: 근데 없잖아요 지금은.
김은희: 긍게 지금이라도 하나 해놓으셔.
김죽파: 저, 뭐냐, 문화재 그 누구냐.
문재숙: 이보형 선생님!
김죽파: 이보형씨! 집에 가니까 <토끼화상>밖에 없잖아. <명기 명창>도 있고, 심청전도 넣고 그랬는데.
문재숙: 심청전 뭐 넣으셨는데요?
김죽파: 황성 가는 대목.
문재숙: 병창으로요?
김죽파: 응, 병창으로 젊었을 때. 그 목이 초롱초롱 했잖니 그땐.
문재숙: 아 좋데. 선생님 목 참 좋으시더라.
김은희: 참 소리가 좋아. 아 조금 더 찾아보라고 허지.
김죽파: 목이 구성은 좀 있지 내가. 세성이 좋고.
문재숙: 세성이 뭐예요?
김죽파: 가는 성, 속청. 세성이 좋아서 가곡도 잘했고 그랬어.
문재숙: 가곡도요?
김죽파: 가곡 청이 세성이지. 근데 양잿물이 사람을 죽였어. 양잿물 먹고 이렇게 버린거야, 내 목소리를.
문재숙: 스물 두 살에 잡수신 거요? 스물 두 살에.
김죽파: 응, 그 때 먹었지.
[1987년 7월 11일 김죽파 증언 녹음 카세트테입 B면]
문재숙: 할머니 모시고 서울서 두 분이서만 사시면서 그 때 예기 권번에. 그 때 권번 이름이.
김죽파: 조선권번.
문재숙: 조선권번에 적 두시고.
김죽파: 그날 저녁부텀 놀음댕기게 해. 명부를 넘기거든. 예기 권번에 입단이 되면은 각 요정에 명부를 돌려, 새로 온 기생이라 해 가주구.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인력거가 와서 가서 댕기기 시작헌 게 늘 댕겼지. 한달, 요정에 댕긴 시간으루 따져서 한달을 통계로 해가지고 시간 많은 사람을 1,2,3,4,5등까지 해서 상, 상금. 상금이 아니라 뭐 패물을 상을 줬어요 1등, 2등, 3등, 5등까지. 2등 헐 때도 있고, 어떤 때는 3등 헐 때도 있고, 1등 헌 때도 있고 그래. 시간으로 따져서 재미있게 살았지, 그 때.
문재숙: 그 때가 선생님 아주 날리셨을 때구나.
김죽파: 그럼 날릴 때지. 그래 가주구 스물 한 살엔가 스물 땐가 내가 취입을 허고 그 취입한 게 산조, 병창, 민요 헌 게 그때 헌 거야.
문재숙: 네, 그 때 산조 테이프가 없는 게 참 섭섭해요.
김죽파: 있었는데 없어져 부렸지.
문재숙: 선생님. 그 <토끼화상>이니 뭐 그런 것들은.
김죽파: <명기 명창>도 내가 했거든.
문재숙: 그 때 <명기 명창>은 저 분한테 배웠다 그러셨잖아요.
김죽파: 심상건씨!
문재숙: 심상건씨는 언제 배우셨어요?
김죽파: 서울 올라와서 바루.
문재숙: 예기 권번에 다니면서 그 때 심상건씨한테.
김죽파: 낮이믄 심상건씨가 와서 가르쳐 주고 가고.(문재숙 엮음, [영산회상] 서울:민속원, 2001년, 156·162·163·173·180·181·204·205쪽 부록-김죽파와의 대담)
* 해제: 상기와 같은 김죽파 명인의 증언을 통해서 김죽파가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내력을 자세히 알 수가 있다. 김죽파는 김운선이라는 이름으로 1930년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일축조선소리판 포함), 1932년 폴리도르음반회사에서 가야금병창, 가야금산조, 판소리 유성기음반을 녹음한 바 있다. 가야금 명인 김죽파와 그의 여동생 판소리 명창 김은희의 상기 증언 가운데 송만갑, 박봉술 명창의 판소리 관련성에 대한 언급도 귀중하다고 생각된다.
상기 증언자료에 의해서 김죽파 명인의 가야금병창 단가 <명기 명창> 유성기음반의 경우 김죽파가 심상건한테 배운 것을 녹음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1932년에 김죽파가 취입한 다음과 같은 유성기음반이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0321
Polydor 19014-A(5201BF) 短歌 新名妓名唱 伽倻琴竝唱 金雲仙 鼓-金昌善
Polydor 19014-B(5220BF) 春香傳 離別歌 金雲仙 鼓-金昌善
1932년 당시 김죽파가 취입한 가야금산조 유성기음반은 다음과 같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CD-0173~0174
Polydor 19013-A(5199BF) 散調 즁머리 伽倻琴獨奏 金雲仙 鼓-金昌善
Polydor 19013-B(5200BF) 散調 원머리 伽倻琴獨奏 金雲仙 鼓-金昌善
김죽파가 생전에 찾았던 또다른 유성기음반으로 다음과 같은 음반 등이 발견된 바 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0138
Polydor 19017-A(5203BF) 流行歌 二八歌·梧桐나무 伽倻琴竝唱金雲仙 長鼓金昌善
Polydor 19017-B(5204BF) 流行歌 아리랑 伽倻琴竝唱金雲仙 長鼓金昌善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2033
Polydor 19084-A(5202BF) 短歌 蘆花月(白鷺橫江) 伽倻琴竝唱 金雲仙 鼓-金昌善
Polydor 19084-B(5219BF) 沈淸傳 花草歌 金仙雲 鼓-金昌善
문재숙 엮음 [영산회상](서울:민속원, 2001년) 205쪽 주석 52번에 김죽파가 오케이음반회사에서 취입한 <이별가>와 <토끼화상> 유성기음반 음원을 박범훈이 일본에서 구해 왔다는 문재숙의 설명 글이 있는데 이것은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의 유성기원반 복사본일 가능성이 있다. 이는 1930년에 녹음된 다음과 같은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 유성기음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234
Regal C182(1 21128) 伽倻琴幷唱 離別歌(春香傳 中) 金雲仙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MIDAT-0251
Regal C148-A(21127) 伽倻琴幷唱 토기화상 金雲仙
◯ 판소리, 가야금 명인 김연수 증언
김연수(金練守:예명, 본명:김종수, 女)는 1911년 11월 3일(음력, 호적도 동일) 경남 마산시 석동 산호리(지금의 원정) 222번지에서 부친 김철조와 모친 김모씨 사이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모친 김모씨는 김연수가 아주 어릴 때 세상을 떠나 이름을 잘 모른다고 한다. 김연수의 부모는 모두 농사일을 했고 국악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연수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하나 있으나 이들과 연락이 두절된지가 몇 십년 되었다고 하며 이 형제들 모두 비국악인이라 한다.
김연수는 10대 때 마산에서 한량 한모씨(창원 사람)에게 양금풍류와 가야금풍류를 익혔고 전라도에서 온 어떤 사람한테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그리고 김연수는 10대 후반에 마산에서 꽤 오랫동안 강태홍에게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사사했다.
김연수는 10대 때 무명 소리꾼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20대 초반에 진주에서 송만갑한테 단가 <진국명산>과 <백구타령>,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를 사사했다. 김연수는 송만갑의 남자 성음을 그대로 땄다고 한다. 송만갑 아들 송기덕이 일제 때 경부를 지냈는데 김연수는 송기덕을 보진 못했고 말만 들었다고 한다.
김연수는 송만갑 다음으로 전라도에서 2년간 유성준한테 수궁가 한바탕을 배웠다. 그리고 김연수는 20세 무렵에 김윤덕 등 5∼6명과 함께 정남희한테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20대 때 서울에서 며칠간 안기옥에게 가야금산조를 사사했다. 정남희와 안기옥은 나이가 서로 비슷한 친구 사이였고 가야금산조 가락도 비슷했다 한다. 정남희는 산조 연주시 발발성이 있으나 재치있게 연주를 했고 안기옥은 정남희보다 이름이 덜 났지만 가야금을 잘했다 한다. 춤은 김연수가 어려서 마산과 진주에서 무명인들한테 조금 배웠으나 취미가 없어서 잘 안추었다 한다.
김연수는 19세와 22세 무렵에 일본으로 가서 오케이(Okeh) 음반회사에서 여러곡을 취입, 한국 서울 시에론(Chieron) 레코드회사에서 여러장의 음반을 녹음하였고 40여년 전에는 한국 대도레코드사에서 가야금병창 장시간음반(LP)을 낸 바 있다.
김연수가 오케이에서 가야금병창 유성기음반을 취입하고 일본에서 공연을 할 때 임방울, 이화중선, 이중선도 함께 공연하고 같은 곳, 같은 때 같이 다니며 음반을 취입했다고 한다.
이중선은 철성, 양성이라 한다. 이화중선은 아편을 하고 그래도 목소리가 천성적으로 아주 좋아서 힘을 안들이고 줄줄 잘했다고 한다. 이중선은 <육자배기>를 잘 불렀다 한다.
김연수는 이선유, 장판개, 김창진, 백점봉, 방진관, 심상건, 박중근, 한성기, 신관용은 잘 모른다고 한다. 한성준은 충청도 사람으로 북을 잘쳤고 이동백은 충청도 사람인데도 전라도 사람 이상으로 소리 잘하고 너름새가 좋았다 한다.
송만갑은 늙었어도 상성, 고음(양성)이 젊은 김연수보다 더 잘 나왔다 하며 흥보가가 특기였다 한다. 다른 이들은 가사책이 있었으나 이 송만갑은 그런 책이 없었다 한다.
김정문은 송만갑의 수제자라 한다. 너름새 좋고 소리를 아주 잘했으며 아편을 했는데 송만갑제를 자기 나름대로 맛있게 바꿔서 불렀다 한다. 김정문은 김연수와 함께 한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김연수가 송만갑한테 배운 것과 다르게 소리했다 한다.
김창룡은 상, 중, 하청 모두 아주 좋았으며 너름새로 한목 본 명창이라 한다. 정정렬은 전라도 사람으로 춘향가가 특기였고 김소희가 이 정정렬한테 배웠다 한다. 정정렬은 가사를 소상하게 잘했다 한다. 정정렬의 제자 중에는 김여란이 하청을 잘 구사했다 한다.
판소리 명창 강소춘은 마산 사람으로 김연수보다 3∼4세 연하라 한다. 오태석은 국창 박록주와 함께 살았는데 어렵게 살다가 죽었다 한다. 신금홍은 전라도 사람으로 박록주 또래이며 인물 좋고 <육자배기>를 잘했는데 가족도 없이 외롭게 지내다가 일제 때 중국사람 집에서 아편 때문에 참혹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김종기는 김연수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사람으로서 가야금, 설장고, 거문고, 북, 대금 등을 두루 잘한 재주꾼이었다 한다. 김종기는 김연수 25세 무렵에 작고했는데 김초향이 김종기 작고 직전 병문안 가자고 해서 김연수가 따라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김초향은 판소리를 아주 잘한 사람으로 대구에서 명창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김초향을 김종기가 누님이라고 불렀고 김연수는 김초향에게 형님이라 했다 한다.
김남수는 키 크고 인물 좋고 김연수보다 2세 가량 연상이며 김소희의 이모인데 오래전에 작고했다 한다. 김남수의 소리는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박동실은 전라도 사람으로서 김연수가 부산에서 박동실이 소리하는 걸 단 한번 목격했는데 소리목은 나빴으나 정말 소리를 잘한 이였다 한다. 이때 김연수와 박동실이 함께 공연을 했다 한다.
조상선은 같이 월북한 정남희 또래이고 조소옥과 한 집안 사람으로서 소리를 잘했다 한다. 조소옥은 전라도 사람으로 김연수보다 4∼5세 연하라 한다. 백락준, 박팔괘, 김금암(김병호)에 대해서는 김연수가 말만 조금 들었다고 한다.
박종기는 김연수가 요리집, 잔치집에서 종종 목격했는데 다리를 절고 다녔고 서울에서 대금 연주자로 유명했으며 누가 듣더라도 감동받게끔 대금을 아주 잘 불었고 특히 굿거리 연주가 장기였다 한다. 김연수는 그 굿거리가 엇중모리 장단이라고 하였다.
본 조사시 김연수 명인이 옛 친구 방금선을 찾았고 그리하여 필자가 이 두 명인을 상봉시켜 드려 이분들은 며칠간 함께 숙식하며 밤새워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연수는 작고한 오비취, 신숙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신숙은 방금선 또래이며 인물 좋고 단가를 잘했는데 외롭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연수보다 이소향이 어려서 이소향이 김연수 보고 형님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소향은 미아리에 집이 있었고 아이가 여럿 있었다 한다. 이소향의 스승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병창, 서도창, 서울노래 등을 두루 잘 불렀다 한다.
한승호는 한갑득 일가로서 소리를 곧잘 했고 김연수 보고 누님이라 불렀다 한다. 김연수는 창극 단체에서 활동한 적은 없으며 국악 안하고 평범하게 지낸지가 40년 정도 된다고 한다.(2001.1.14.14:30∼16:30.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김연수 자택에서 노재명이 김연수 명인을 인터뷰한 내용 정리)
* 해제: 판소리, 가야금 명인 김연수는 2002년 8월 28일 오전 8시 10분에 92세로 별세하였다. 상기 증언자료에 그간 밝혀지지 않았던 이 김연수 명인의 인적 사항, 유성기음반 취입 회고담, 유성기음반 시대 명인명창들에 관한 기억 등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다.
◯ 판소리 귀명창 김길희 증언
김길희는 현 생존시 100여세의 연령인데 예전에 판소리 행사장과 국악인 전수소 등에서 간혹 만날 수가 있었고 당시 연락처나 연령 등을 극구 밝히지 않아 그의 인적 사항은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사진을 같이 찍는 것도 극히 거부하여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그의 사진은 국악음반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2장이 그에 대한 사진 전부이다.(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1420~01421)
필자는 이옥천 판소리 전수소에서의 만남을 끝으로 1990년대 후반 어느날부터 그를 목격할 수가 없었다. 김길희와 가까웠던 이옥천 역시 그 무렵부터 김길희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국악인들과 몇몇 애호가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고되는 진정한 판소리 귀명창이다. 노년에도 아이처럼 순수한 언행을 지녔으며 어린 시절에나 말년에나 상하 호형호제하고 지냈다.
김길희의 작은아버지가 명창 이화중선의 열렬한 팬이자 후원자였다. 부유한 집안 살림 거의 전부를 국악 발전에 쏟아 부은 가문이다.
김길희는 정노식, 박록주와 절친했다 한다. 명창 박록주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말년에 그 앞에서 김연수, 김득수 등 어떤 국악인도 말문을 못열었다 한다. 박록주는 민족주의 사상가인 애국자 남씨와 살았다고 한다. 박록주는 명창 신금홍을 별로 안좋아했다 한다. 박록주는 판소리 지도시 매우 섬세하여 제자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한다. 경상도 출신 명창 박록주의 판소리를 전라도 사람들은 모즈락스럽게 맺고 끊는 소리라 하여 ‘장작 패는 듯한 소리’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다. 김길희의 말에 의하면 국악 애호가 신은휴는 박록주에게 판소리 사설 뜻풀이를 해주곤 했다 한다. 신은휴의 아들은 판사였다 한다.
판소리 명창 이선유의 아들 이재호(대중가요 작곡가)는 진주고교 음악교사였고 명창 모추월이 이선유의 제자라 한다. 명창 강장원은 정광수와 고향이 같고 동갑이며 별명이 양반이라 한다. 강장원이 이동백의 불같은 성격을 참으며 소리를 배운 건 대단한 일이라고 김길희는 말한다. 정광수는 장택상 별장에서 이동백한테 적벽가 중 <삼고초려>를 배웠다 한다.
이동백은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는 완창을 종종 하였고 수궁가와 흥보가는 일부만 불렀으며 일제 때 함경도에 명창 이동백, 김창룡 팬이 많았다 한다. 김길희는 일제 말기에 징병을 거부하고 수배중 다옥동 태화관에서 이동백을 초청하여 판소리를 감상하였고 부민관에서 열린 이동백 은퇴 공연을 관람한 바 있다. 이동백은 자신의 스승 얘기는 안했다고 한다. 이동백의 여러 공연 때 김길희는 고수 지동근을 별로 보지 못했다 한다. 김길희의 소감에 따르면 고수 한성준, 정원섭은 국악과 관련된 사업 수완이 좋았다 한다. 일제 때는 가정집에서든, 일반 무대에서든, 음반 취입에서든 판소리 반주를 장고로 많이 했다고 한다.
판소리 명창 김채만은 전남 광주 태생으로 강진에서 작고했으며 명창 박동실은 김재선의 북반주를 좋아했고 아편을 했다 한다. 명창 임방울은 착하고 솔직하고 고지식하며 순진한 사람인데 성품이나 판소리의 느낌이 마치 소동파 시를 연상케 한다고 김길희는 말한다.
임소향은 정정렬의 제자로서 소고춤을 잘 추었고 창극 춘향전에서 춘향모 역을 잘했으며 대구 약전거리에 집이 있었다. 임소향은 목성음의 항이 크고 성음 속에 이면 표출이 들어있고 잔재주를 별로 부리지 않았다. 임소향은 발림이 멋있었고 흥이 넘쳐서 무대에서 뒤로 넘어진 적이 있다. 임소향은 조상선과 살았다 한다.
조상선은 정정렬의 제자로서 창극의 귀재였고 1945년 무렵에 프로레타리아 창극 ‘만리장성’(안영일 연출)의 소리를 짠 바 있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 신숙(춘향), 정남희(몽룡), 오태석(방자), 조상선(후배사령), 박옥진, 장영찬 등이 창극 ‘춘향전’(유기룡 사업부 창극단)을 공연한 바 있다고 한다. 조상선이 창극을 기가 막히게 잘했고 정남희, 오태석도 창극을 잘했다 한다. 명창 장판개, 김정문도 창극을 한 바 있다고 한다.
이화중선의 판소리에는 어정소리, 춤 가락, 잡가 등 당시 시대상이 골고루 담겨있다고 김길희는 말한다. 김길희는 예전에 김해 김록주의 적벽가 유성기음반을 본 적이 있다 한다.
박록주와 살았던 순천 갑부 김사천이 박봉술을 후원하였다 한다. 박록주, 김사천이 서광사에 갔다가 김사천이 빈대로 인해 병에 걸렸다고 한다. 김사천은 서울 병원에서 이질로 타계하였다 한다. 예전에 순천 뒷골목에 소리꾼이 많았고 순천 성군수 집에서 명창 유성준이 소리 선생으로 있으면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한다.
그리고 김길희의 의견에 따르면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사설 가운데 요즘처럼 ‘작은 이도령’이라고 하면 이면에 맞지 않고 소리가 구겨지는데 ‘작은 이도령’보다는 명창 송만갑, 이화중선, 박록주가 불렀던 것처럼 ‘애기’라고 하는 게 더 낫다고 한다.(1994.4.6.19:30~24:00, 1994.4.22.18:30~24:00.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옥당국악실 이옥천 판소리 전수소에서 노재명이 김길희 귀명창을 인터뷰한 내용 정리)
* 해제: 이 김길희 귀명창의 증언자료에는 유성기음반 시대 명인명창에 대한 귀중한 기억이 많이 들어있다. 김길희가 예전에 목격한 김해 김록주의 판소리 적벽가 유성기음반은 다음과 같은 <조조 군사 설움타령> 음반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음반은 실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졔비標朝鮮레코-드 B128-A (三國誌) 죠죠군사서름가上 金綠珠
졔비標朝鮮레코-드 B128-B (三國誌) 죠죠군사서름가下 金綠珠
◯ 판소리 명고수 김명환(1913~1989년) 증언
우리 집이 옥과선 제일 부자지. 송만갑이 같은 명창도 오고 인자 장판개, 김정문 그런 명창이 온단 말이요. 그러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소리럴 헙니다. 나 한 서너살 묵었을 때 아부지가 나럴 보듬고 인자 소리럴 들었는디 여덟살 묵어서는 소리가 좋더라니까.
일본 있다가 인자 방학 때는 늘 나와서 소리럴 들었어요. 한국만 오면 송만갑이 판, 이동백이 판, - 그때는 정정렬이 판은 안 나왔을 때여 - 화중선이 판 모도 사 갖고 가서 들었어요. 방학 때는 마누라 보러 나오는 것이 아니고 소리 듣고 북 칠라고 나왔어.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요” 요놈은 그전에 모흥갑씨 더늠인디 다른 사람들은 장단얼 다 채웁니다. 그렇지만 모흥갭이 더늠은 반각에서 끝낸 수가 있지요. 거 소리 가꿔 나가는 거시기가 안틀리요? 또 거시기 뚝 떨어져. 거 올린 놈 육관청도 더 되지. “여보시오, 도련님” 요 대목은 춘향이가 허는 소린디 느닷없는 성음이 안나오요. 이게 판소리요. 송만갑씨가 모흥갑씨 더늠으로 노래한 레콧드 있어요. 옛날 사람들 그렇게 걸음제가 안들었습니까? “나럴 어쩌고 가랴시오” 거 어찌 묘하게 탁 차고 나가지요.
조산옥이라는 옛날 기생이 있는디 거그 어머니가 어정얼 잘헙니다. 무속들 굿허는 거. 근디 레콧드에 넣었단 말이여. 긍깨 송 감찰(송만갑)이 판얼 딱 들어보더니 “그 여편네 못 나무래겄구만. 좋아”, 김창룡은 “형님 말씀이 옳소. 잘허요” 그러면서 들었어요. 옛날 당골네들 굿허는 거 하세 받았지만 그것이 보물이고 참 문화재일 것이요.
방초 영감(신방초)이 맹그랐다고 하는 그 <화초 사거리> 기가 맥힌 노래요. 박녹주가 배와 가지고, 김소희씨나 오정숙씨 뭐 지금 한농선, 성창순 전부 다 박녹주씨한테서 배웠던 모양이야. 근디 <화초 사거리> 어렵습니다. 판소리 목이 다 들어가 있어여. 근디 <화초 사거리>는 참 반각으로 띄어 나가다가 끄터리 가서 원각으로 맞어가. 또 반각으로 띄어 나가고. 거 맛이 있는디, 여 인자 원체 이십사박 찾고 야단이고 반각에서 떨어지먼 못씬다 그런 소리럴 듣고는 말여, 박녹주가 득수 데려다 북얼 치 놓고 고놈얼 원각얼 채웠네! 그리서 <화초 사거리>럴 베리 부맀어요.
근디 축음기 판얼 틀어줍디다. 내 앞에서, 박녹주가. <화초 사거리>럴 딱 듣고 - 나도 입이 빠르지 - “저 <화초 사거리> 아녀. <화초 사거리> 베맀어. 아, 저 반각에서 띄어 나가야 허는디 저 뭐여. 저것이 왜 꼬리럴 달어 갖고 저러냐”고 그렇께는 대번 항복헙디다. 나도 배울 때는 반각얼 띄어 나갔는디 말여. 그렇게 배웠는디 요새 인자 반각에 떨어지먼 못씨는 체해서 역부로 지어 너갖고 원각얼 채운 것이라고 긍게 그말이 옳다고. 그래서 걍 박녹주가 고쳐 버렸지. 거그럴 반각에 띄라는 것이여. 그래야 재미가 있지.
내가 학교럴 작파해 버리고 장판개 선생헌티 일년 육개월얼 행줏보 노릇얼 하고 안힜소. 기생방에서 걸레 노릇얼 힜어요. 거그서 북이 많이 늘었어요. 마당에 소리 들을 중 아는 사람들, 좋아허는 사람들 모도 꽉 찼어요. 무대럴 딱 꾸며 놓고 임방울이가 ‘수궁가’럴 허는디 나는 귀가 어찌 높았는지 양이 안찹디다. 그래도 그때 임방울이 전성 시대였었고 <쑥대머리> 막 레콧드에 넣었소. (임방울이) 장 선생(장판개)얼 모셔 갖고 <여봐라, 군사들아>에서 <장승타령>까지 띠었어요.
배삼룡이라고 있었는디 또 고놈도 목이 안돼. 장 선생(장판개)이 인자 고놈 갈친 것 작파허고 올라고 허는디 방울(임방울)이가 일본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어요. 고수는 임방울 즈그 형 임세근, 젓대 부는 사람인디 장단이 못씨겄거든. 긍게 장 선생 보고 북얼 잡으라 허고 레콧드 취입얼 했습니다, 돈 팔백완이나 받고. 장 선생도 <진국명산>, <노정기>, <한 장수 나온다>에서 <남병산 바람 빌어갖고 활 쏘는 디>까지 넣었는갑습디다. 인자 동경 가니까 좋은 것이 쌨거든. 방울이가 “형님 구경 많이 허쇼, 좋지요?” 헝게 “급살 맞을 것, 박달나무 좋은 놈 두어개 있으먼 쳐부술 것인디” 허드라요.
이동백씨는 큰닭 두 마리 푹 삶으면 혼자 두 마리 다 묵어요. 도가니탕 말려서 빻아 갖고 다니며 한 주먹씩 묵고. 영감이 기운이 세고 풍신이 제일 좋은디 때깔은 없어요. 긍게 일흔여덟까지 소리럴 했어. “인자 늙어서 못 부르겄다” 그럼서. 송만갑씨보담 목이 굵어요. 그러지만 구성져. 그런디도 레콧드에 넣어서 들으면 통정(이동백) 소리는 잘 안들리고 송 감찰(송만갑) 소리는 쩡쩡 울려요. 송만갑씨헌티 노상 물소라고 놀림얼 당허는디 소리 허는 거 보면 미련하게 안해.
박기홍씨는 판(유성기음반)이 하나도 없어요. 나이는 김창환씨가 박기홍씨보다도 더 아래라구 그러는데(다른 증언 날 김명환은 김창환이 박기홍보다 연상이라고 함) 김창환씨는 판이 있는데 박기홍씨는 없어.
박금향이라고 지금 일흔여섯이나 됐을 것입니다. 나보다 한 살 더 먹었어요. 박녹주씨 조금 밑에여. 참 좋게 생겼습니다. 그이 공부헐 때 내가 북이 많이 늘었습니다. 장판개 선생헌테 일년 반은 공부했는디 한참 소리 잘헐 때는 화중선이고 박초월이고 김소희고 그때 애기들이고. 일제 때 한참 레콧드 취입얼 헐 땐디 박금향이는 취입얼 마다허고 안헌 사람입니다. 장차 자기 자식들얼 생각히서 그런다고. 그러고 기생 몸이지만 지조가 강해요. 또 공부헐 때는 무서운 분에여. 저녁이먼 밤 열두시 되드락 소리 해 갖고는 또 새복 한 세시쯤 또 일어나서 혼자 목침 놓고 소리 허고 있어요. 장판개씨허고 나허고 “저 사람이 국창이 될라고 잠도 못자게 허고 소리 허고 앉았다”고 했어요. 지금 미국에서 산다는갑디다.
함동정월이는 박초월이나 김소희보다 훨씬 먼야 출세했습니다. 열여섯살에 동경 가서 레콧드 취입얼 십여 가지 최초로 넜어요. 그때 판 불티나드끼 나가 부렀소. 그땐 참 이뻤소.
한성준이가 한참 거 어설픈 광대들 서울에 와서 소리 헌다 치면, 돈이 가사 만환이 나오면 자기가 한 구천환이나 구천오백환 먹어 부리고 한 오백환 소리 헌 놈 찌크려 주고. “내가 니까짓 놈 소리 치고는 너하고 같이 돈 묵어야” 하고 그런 사람이여. 그이가 바느질얼 해서 돈 벌 구역얼 맹글아. 주인이지, 주인. 그래 갖고 돈얼 벌었어. 긍게 그이는 판북얼 치는 것은 별루 없구 레콧드 취입한 데서 몇 분간씩 쳐주고 잠깐 거시기 했제.(김명환 구술, 김해숙·박종권·백대웅·이은자 편집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서울:뿌리깊은나무, 1991년, 40·56·61·78·79·91·92·94·103·105·117·123쪽)
소리꾼에 대한 박대에 불만이 많았던 송만갑은 영덕과 기덕 두 아들에게는 소리를 못하게 했다. 기덕은 집안의 피를 받아 소리를 잘했고 송만갑과 동일한 목구성을 가져 동경, 대판에서 레코드 취입도 했지만 송만갑은 송문일가(宋門一家)의 예술적 맥을 아들에게는 잇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송기덕은 순사 시험에 합격하여 전라도 영산포 주재소에서 일했고 이로써 우리는 출중한 광대 집안 송문일가의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문재숙, “비화 명인·명창전(상)” [음악동아 1986년 11월호] 서울:동아일보사, 157쪽 김명환 증언 내용)
송만갑은 판소리, 창극뿐 아니라 레코드 취입도 많이 했다. 따라서 장터에서는 약장수, 엿장수들이 나발 모양의 빅타 축음기로 그의 노래를 마구 틀었다. 이를 본 장판개(張判介, 1885~?)는 “소위 국창(國唱)의 소리를 장바닥에서 저렇게 함부로 틀어대니 난 취입하지 않겠다”며 한사코 레코드 취입을 거부했다. 이에 임방울이 “선생님 같은 대가가 없는데 판을 찍어 후세에 남겨야 합니다. 일본 구경겸 가십시다” 하며 설득하여 죽기 몇해 전 <제비노정기>, 적벽가 <조조가 관운장에 비는 장면>, <진국명산> 등 7~8편을 일본에서 녹음했다.
임방울이 단계면으로 부른 춘향가 중 춘향이가 옥중에서 님을 그리며 애절하게 부르는 <쑥대머리>는 1백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레코드판이 팔려 나갔다. <쑥대머리>뿐만 아니라 그의 히트곡으로는 진계면으로 부른 <추억>이란 노래가 있다. 이 곡은 임방울이 작사, 작곡한 것으로 사랑했던 여인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만든 것이다.(문재숙, “비화 명인·명창전(하)” [음악동아 1986년 12월호] 서울:동아일보사, 168~169쪽 김명환 증언 내용)
* 해제: 김명환 명인이 판소리 명창들의 유성기음반을 직접 사서 듣고 영향받은 사실, 박기홍·이동백·송만갑·송기덕·장판개·임방울 명창과 한성준·함동정월 명인의 유성기음반에 대한 기억 등 소중한 증언 내용이 들어있다. 박기홍·박금향은 김명환의 증언과 같이 유성기음반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상기 김명환의 증언 가운데 박록주 <화초 사거리> 축음기판이라는 표현은 정황상 유성기음반(SP)이 아니고 12인치 장시간음반(LP)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판개 단가 <진국명산>,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 유성기음반(1935년 녹음, Okeh 1891)은 실물이 발견되었으나 김명환이 언급한 장판개의 나머지 판소리 유성기음반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임방울 판소리 녹음시 장판개 명창이 고수로 참가하여 북 반주를 한 유성기음반은 다음과 같다.(임방울 판소리 적벽가 중 <고당상> 고수:장판교=장판개, 1935년 녹음)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1034, MISP-1659, MISP-2149, MISP-2286
Okeh 1885(K284) 赤壁歌 호천망극(高堂上)(上) 林방울 長鼓張判橋
Okeh 1885(K285) 赤壁歌 호천망극(高堂上)(下) 林방울 長鼓張判橋
◯ 가야금, 거문고 명인 방금선 증언
방금선(方錦仙:본명)은 1916년 2월 28일(음력) 경남 진주시 앵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방삼백, 모친은 이인순이고 방금선 위로 오빠 1명, 언니 1명이 있었고 동생 3,4명은 어려서 사망했다고 한다.
방금선의 부친 방삼백은 1940년대 61,62세로 작고했고 모친 이인순은 1970년경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집안에서 국악을 한 사람은 방금선뿐이라 한다.
방금선의 국악 스승은 김종기, 안기옥, 김정문, 정정렬, 신쾌동, 한갑득, 정남희, 유성준 등이라 한다.
방금선의 첫 스승은 김종기로서 15,16세 때 수개월 동안 진주에서 오비취 등과 함께 김종기에게 가야금산조를 일부 배웠다고 한다.
방금선은 15,16세 때 2~3개월 동안 진주에서 김정문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심청가 중 <심청이 선인 따라가는 데>~<범피중류> 등을 익혔다.
방금선은 16세경 2~3개월간 진주에서 안기옥한테 가야금병창을 사사했다. 방금선은 6.25 때 안기옥이 빨간띠 매고 남한에 내려와 북한을 찬양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방금선은 16세 무렵에 이화중선 단체에 소속되어 일본으로 공연하러 갔을 때 시에론레코드회사에서 단가 <죽장망혜>, 춘향가 중 <이별가> 등의 독집 유성기음반을 취입하였다.(장고 반주:이화성)
방금선은 20세 무렵 2,3개월 동안 진주에서 유성준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심청가 중 <범피중류> 등을 배웠다. 방금선의 말에 의하면 유성준은 전라남도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방금선은 20세 무렵 조선성악연구회 시절 몇 달 동안 김소희 등과 함께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조금 배웠다.
방금선은 23세 무렵부터 2~3년간 신쾌동에게 거문고 풍류와 산조 한바탕을 재미가 있어 열심히 사사했다고 한다.
방금선은 20대 후반에 몇 개월 동안 서울에서 김연수(女), 오비취 등 60~70명과 함께 정남희에게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배웠다. 또 방금선은 30대 때는 수년간 한갑득한테 거문고산조 한바탕을 익혔다. 이후 방금선은 주로 거문고를 연주했다고 한다.
판소리 명창 김남수(女, 스승 미상)는 김소희의 이모로서 방금선보다 열살 이상 연상인데 방금선 나이 20대 때 작고했다 한다.
권금주는 함양읍 출신으로서 방금선보다 20~30세 연상이고 1980년경 타계했다 한다. 신숙은 함양 출신으로서 방금선보다 한 살이 많은데 서로 친구 사이로 지냈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신숙은 1970년대 58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소향(스승 미상)은 경북 출신으로서 방금선보다 20세 정도 연상이라고 한다. 김옥련은 전라도 태생이고 방금선보다 다섯 살 가량 연하로서 김연수 단체 소속이었다고 한다.
조앵무는 방금선보다 열댓살 연상이고 일제 말기에 작고했다 한다. 배설향과 신금홍은 경상도 태생으로서 방금선보다 20세 정도 연상이라고 한다. 김해 김록주는 방금선이 말만 들어봤다고 한다.
신옥란, 신진옥, 신연옥, 강춘섭, 권농선, 김홍규, 박소춘, 방진관, 방응규, 신향심, 임옥돌, 임명옥, 임명월, 주송사에 대해선 방금선이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 이선유는 방금선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방금선은 중년에 국악 활동을 중단하고 부산에서 인쇄공장을 경영하며 살았고 그러다 사업을 그만둔 것도 어언 수십년이 되었다 한다.
방금선은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효성이 지극하고 매달 생활비를 보내와 걱정 없는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다. 방금선의 딸은 이화여고, 이화여대를 졸업하였고 은행에서 근무를 한 바 있는 비국악인이나 취미로 배운 가야금(성금연 사사)과 전통춤의 수준이 대단하다고 한다. 방금선의 딸은 슬하에 아들 1명, 딸 1명, 외손자 2명을 두었다고 한다.(2000.12.19, 2001.3.11. 노재명이 방금선 명인을 인터뷰한 내용 정리)
* 해제: 방금선 명인 인적 사항, 방금선 명인의 국악 유성기음반 취입 내력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증언 내용이다. 유성기음반 시대 명인명창들에 관한 기억도 담겨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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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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