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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강순영의 국악세계' 음반(CKJCD-001, 1CD, 1998년, 섭외·기획·해설 집필:노재명) 해설서에 실린 것이다.
강순영 명인의 생애와 예술<2>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강순영은 신관용 문하에서 배운 산조 가락 그대로 연주하려고 노력한다 한다. 그리고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는 다른 유파에 비해 잉어걸이, 말 뛰는 가락 등 독특한 점이 많다고 말한다. 강순영은 신관용류 외에 다른 유파의 산조 중에는 함동정월류 가야금산조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한다. 강순영은 스승 신관용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청을 잘 맞춰 가야금을 타야 하고 떠는 발발성은 절대로 내서는 안된다. 뒷손 정리를 잘해야 발발성을 피할 수 있다.”
강순영 일가는 유명 국악인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으나 강순영의 부모는 그가 국악 하는 것을 강하게 만류했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친척 가운데 국악인이 많았기에 누구보다도 국악인들의 험난한 역경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의 국악계 진출을 무척 염려했던 것 같다. 허나 일찍부터 국악에 깊게 매료된 강순영의 뜻은 확고했고 끊임없이 국악 학습에 매진했다.
강순영은 신관용 문하에서 가야금을 익히는 동시에 그와 같은 시기인 15세 무렵부터 약 5년 동안 사촌오빠인 강도근에게서 여러 단가와 판소리 다섯바탕을 토막소리로 배웠다.
그리고 강순영은 19세 무렵 한달 동안 이기권(정정렬 제자)의 문하에서 숙영낭자전(정정렬 작곡)을 비롯해서 여러 단가를 배웠다. 당시 이기권은 이리권번의 판소리 선생이었는데 무대 명창이기 보다는 소리 선생으로 더 유명했다. 강순영이 당시 이기권 문하에서 배운 소리 중에서 지금 부를 수 있는 것은 단가 <사창화림>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강순영은 가야금뿐 아니라 판소리 학습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고 그리하여 가야금 외에 판소리에도 매우 능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 젊어서는 판소리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1등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강순영은 아쟁, 양금, 무용 등 여러 음악과 춤에도 열정을 보여왔다. 일흔을 넘긴 지금도 그는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아쟁산조는 다름 아닌 조카 강정열한테 근래에 배웠다. 양금은 전남 태생의 시조 잘하던 어떤 노인에게서 배웠는데 그때 익힌 곡은 <염불>, <타령> 등이라 한다. 그리고 무용은 어려서 남원권번의 춤 선생이었던 행옥과 행란 문하에서 기초를 닦았고 중년에는 진주 사람 강귀례(별호 ‘해주댁’)한테 배웠다 한다. 강순영이 행옥과 행란 문하에서 배운 춤은 남원 검무이고 강귀례에게서 익힌 춤은 진주 검무, 살풀이 등이라 한다. 남원 검무와 진주 검무는 칼을 다루는 손놀림이 다른데 남원 쪽에서는 칼을 별로 놀리지 않고 그냥 뿌리는 경우가 많고 진주 쪽에서는 칼을 돌리는 기교가 많다고 한다. 진주 검무는 염불-타령-자진박-타령 순서가 제격이라 한다. 강순영은 이제 나이가 들어 춤을 잘 추지 않고 그 순서도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1996.11.15. 1997.6.12/6.27/7.2∼7.3/7.8/8.28/9.1/9.21∼9.22. 강순영 증언)
강순영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국악은 신관용 문하에서 배운 가야금산조 한바탕, 가야금병창 단가 <어화세상>과 <객래문아>, 이기권 문하에서 배운 단가 <사창화림>, 강도근 문하에서 배운 판소리 심청가 중 <곽씨부인 유언하는 데>와 춘향가 중 <십잡가 뒤의 풍경>이다.
구음은 현재 연로한 탓에 고음 처리가 어려워져서 거의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음반 취입 전날 강순영은 박환영 고수와 연습을 하면서 춘향가 중 <십잡가 뒤의 풍경>을 15분 가량 부른 적이 있는데 강도근 문하에서 배운 송판 동편제(송만갑제)로 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십잡가 뒤의 풍경>은 여러 문제로 인해 음반 취입 당일 녹음이 성사되지 못했다.
1980년 10월 이보형 문화재전문위원의 현장 조사에 따라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서 강순영의 가야금산조에 대한 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이 책을 계기로 그간 묻혀있던 강순영과 그가 보유한 음악의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84년에는 황미연의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연구”라는 논문이 발표되면서 강순영의 가야금산조에 대한 연구가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25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국립국악원 주최의 무형문화재 정기공연으로 강순영의 독주무대가 마련되어 강순영과 그의 산조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공연에서 강순영은 서용석의 장고 반주에 맞춰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연주했고 그의 조카딸 안숙선과 안옥선이 찬조 출연하여 서용석의 장고 반주에 맞춰 가야금병창으로 단가 <녹음방초>와 흥보가 중 <흥보 집터 잡는 데>를 불렀다.
강순영은 27세 때부터 5년 동안 남원국악원에서, 39세 때부터 12년 동안 진주국악원에서, 51세 때부터 지금까지 경남 진주시 평안동 11번지 1통 1반 자택에서 후학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쳐 왔다. 앞서 언급한 강순영의 조카 안숙선, 안옥선, 강정열을 비롯해서 오갑순, 문숙희, 정해임, 강희숙, 김청림, 한혜순, 김현숙 등 30여명이 강순영의 문하에서 가야금, 판소리, 무용 등을 배웠다. 이처럼 강순영은 오랜 동안 제자 양성에 힘썼고 1970∼80년대에는 진주 팔검무 악사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김수악 명인과 함께 진주의 국악 보존과 발전에 주도적으로 힘쓰고 있다.
강순영 명인은 그간 귀한 음악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에 묻혀 지낸 탓에 공연이나 방송 활동이 드물었고 음반 취입도 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가르친 이들은 오늘날 국악계의 스타로 부상하여 공연, 방송 등의 눈부신 활동과 더불어 무수히 많은 음반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강순영 할머니의 데뷔(?) 음반이 나오게 되어 다행이다.
70세를 훌쩍 넘기고 나서 이렇게 자신의 첫 음반을 내게 된 강순영 할머니의 경우는 그래도 행운으로 여겨야 된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순영 명인과 같은 진주 지역에 사는 김수악 명인은 현재 73세인데 단 한장의 음반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김수악 명인은 현재 무용 분야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긴 하지만 춤 외에 구음, 판소리, 가야금 등 여러 음악에도 두루 능하기 때문에 음반 보존이 매우 시급한 상황인데도 현실은 그러하다. 특히 구음의 경우 김수악 명인은 현재 자타공인 최고의 실력가다. 이런 사정은 이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순간 녹음 하나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속절없이 없어지고 말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올해는 ‘문화유산의 해’라고 한다.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다.
1996년 늦가을 강순영 명인을 처음 찾아갔을 때의 그 신선함, 따뜻한 느낌, 그 감동적인 가야금 연주가 다시금 생각난다. 그렇게 엄청난 음악이 지구상에서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음반 취입이 끝날 때까지 조마조마했다. 이렇게 좋은 음질로 영구히 기록으로 남게 되어 기쁘다. 아울러 앞으로도 끊임없이 강순영 명인의 음악이 잘 전승되었으면 좋겠다.(끝)
2000년5월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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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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