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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뱅이굿 인간문화재 이은관 명창 별세
  iunkwan4.jpg(사이즈:114.0KByte)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이은관(李殷官) 명창께서 2014년 오늘 3월 12일 오전 9시 20분 무렵 별세하셨습니다. 향년 98세.
유족은 슬하 1남 4녀, 빈소는 서울시 성동구 왕십리로 222 한양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층 10호실, 발인은 2014년 3월 14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연락처는 02-2290-9442~3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국악음반박물관)

[상기 사진 설명]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10인치 장시간음반(LP) 관리번호 MI10LP-0056
漫談傑作選(張笑八과 그의 一行)
漫談:張笑八·高春子·高白花, 노래:李殷官·池蓮花
Oasis OL-10415(10인치 1LP), 1960년대 초반 녹음 제작. 앞표지 왼쪽부터 차례로 이은관, 고백화, 장소팔 사진 수록.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카트리지테입 관리번호 MICART-0010
李殷官 최신 배뱅이굿 민요 장시간용
유니버살레코드社 HS-1049(1카트리지테입), 1979년 5월 10일 스테레오 제작. 앞표지에 이은관 사진 수록. 심의번호:7810-7286.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1695
1996.1.27.17:30~20:00.서울시 종로구 장사동 130-1 삼성빌딩 4층 이은관 서도소리 전수소.
서도소리 명창 이은관 증언 장면. 대담/촬영: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04년 12월 14일 국악음반박물관을 방문한
배뱅이굿 인간문화재 이은관 명창, 제자분들 모습.

[이은관 명창 증언 내용]
증언/이은관(배뱅이굿 인간문화재)
증언 일시 및 장소/1992.7.14.20:00∼20:20(전화 통화)
1996.1.27.17:30∼20:00 서울시 종로구 장사동 130-1 삼성빌딩 4층 민속예술학원(이은관 서도소리 전수소)
대담 및 정리/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나 이은관(李殷官, 본명:이은관)은 1917년 11월 27일에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회산리 92번지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버지 이윤하, 어머니 길 모(吉 某) 사이에서 태어난 4남 4녀 중 장남이다. 내 위로 누나 둘이 있고 바로 아래 남동생 이은혁, 그 아래에 차례로 여동생 하나, 남동생 이은일, 여동생 하나, 막내 남동생이 있다. 막내 남동생은 갓난아기 때 죽었고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장수하여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
우리 가족 중에서 국악을 한 사람은 나 외에는 없다. 아버지께서는 전문 국악인은 아니었으나 간혹 메나리조로 민요를 부르곤 하셨고 목성음이 무척 좋으셨다.
내가 살던 강원도 이천에서는 경기도, 강원도, 이북 민요가 두루 불렸지만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민요는 주로 이북 소리였다. 내 고향 이천은 행정 구역상은 강원도지만 황해도와의 접경 지역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부르던 민요나 무당들의 굿이 거의 이북식이었다. 강원도 이천은 빈촌이라서 굿이 매우 드물었다. 내가 고향 이천에서 굿을 본 것은 내 나이 10대 중반(1930년대 초반) 때인데, 그 때 두 차례 굿을 본 기억이 있을 뿐이다. 나는 고향에서 이천공립보통학교까지 다니고 외지로 나갔다.
나는 어릴 때 친구 김창재와 함께 어울려 다니며 재미로 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18세(1935년) 무렵에 김득수라는 사람과 황해도 황주에 가서 재니(재인)들과 함께 어울려 떠돌이 공연 단체에서 잠시 음악 활동을 했다. 당시 이길수라는 모개비(단장)가 그 단체를 이끌었다. 고향에 있을 때는 양반, 상놈이라는 신분 구별을 잘 몰랐는데 황주에 가니까 그런 구별이 엄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피리 등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재니)이 상놈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소리하는 사람은 양반 대우는 못받아도 상놈 취급은 받지 않았다.
내가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황주에서 생활하던 바로 그 시절, 내 나이 10대 후반 때 일이다. 그 당시 나는 황주권번에 소리 선생으로 있던 이인수(李仁洙) 명창의 문하에 들어가서 <배뱅이굿>을 비롯한 여러가지 서도소리를 배웠다. 당시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서 소리를 함께 배운 동창생으로는 ‘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모(某) 씨, 그리고 황덕렬 씨가 기억난다. 지금은 ‘진주’라는 사람의 성씨는 기억나지 않는데 얼마 전까지도 살아있었다.
나는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서 나온 20대 초반에 장연권번에서 잠시 소리 선생을 했고 종로권번에서 3,4달 가량 활동했다. 당시 나는 요리집에 불려 다니며 소리를 했는데 한번 불려 가면 10원 정도 받았다. 종로권번은 황명선 씨의 소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황명선 씨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종로권번에서 활동했다. 황명선 씨는 나보다 15세 가량 연상이었고 내가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 무렵 나는 최경식 선생님 문하에서 경기민요와 시조를 사사했다. 그 후 잠깐 고향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왔다. 그 뒤에 가설 무대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박진 씨의 소개로 1940∼1945년 무렵에 신불출 씨가 이끌던 극단 ‘신불출 일행’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신불출 씨의 극단은 주로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신불출 씨의 단체에서 나와 함께 활동한 이들은 김계춘, 박천복, 신옥란 씨 등이다.
광복 후 나는 대한국악원 민요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1960년대까지 박천복, 장소팔, 고춘자 씨 등과 함께 유랑 극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리고 영화 ‘배뱅이굿’ 주연, 방송 활동, 해외 공연 등을 하며 바쁘게 활동해 왔다.
나는 1982년에 KBS 국악대상을 받았고 1984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서도소리(배뱅이굿)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나의 장기는 역시 <배뱅이굿>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부른 소리가 <배뱅이굿>이고 가장 신경써서 독공한 소리 또한 <배뱅이굿>이다. 내가 현재 부르고 있는 <배뱅이굿>은 대략 1시간 정도로 짜여져 있다.
내가 부를 수 있는 서도소리는 <배뱅이굿> 외에 <수심가>, <긴 아리>, <자진 아리>, <제전>, <초한가>, <배따라기>, <긴 난봉가>, <자진 난봉가>, <산염불>, <자진 염불>, <경발림>, <놀량>, <공명가>, <맹인 덕담경>, <파경>, <애원성>, <담바귀타령>, <신고산타령>, <개타령> 등이다. <관산융마>, <전쟁가>, <굼배타령> 등 다른 소리들도 배웠으나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굼배타령>은 평안북도 소리다.
<배뱅이굿>의 경우에는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신세기레코드, 대도레코드, 지구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15차례 가량 취입한 바 있다. 금년(1996년) 봄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배뱅이굿을 영구 보존용으로 비디오 녹화 및 음반 취입할 예정이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신세계레코드, 대도레코드, 지구레코드 등의 음반회사에서 <산염불>, <맹인 덕담경>, <파경>, <애원성>, <담바귀타령>, <신고산타령>, <개타령> 등의 서도소리를 취입한 바 있다.
나는 슬하에 1남 6녀를 두어 모두 출가시켰다. 현재 나는 부인 남상욱과 함께 서울 중구 황학동 1527번지 25통 1반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20여년 전부터 서울 종로구 장사동 130-1 삼성빌딩 4층 민속예술학원에서 제자들에게 서도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박준영, 인정임, 엄재경, 최병문, 김경열, 박경옥, 김경선, 박기옥, 조금희 등이 있다.
옛 서도소리 명창들은 소리를 할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다르게 불렀다. 장단도 다르고 노래 자체를 완전히 다르게 엮어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배우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는 그런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노력한다. 가능하면 제자들이 배우기 쉽도록 장단, 사설, 성음을 일정하게 정형화 시켜서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몇 명밖에 없는 문하생들 조차도 서도소리는 너무 어렵다며 포기하고 말 것 같았고 서도소리의 명맥을 조금이라도 이어보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승들에게서 배운 옛 소리 외에도 이 시대와 앞으로의 시대에 맞는 민요를 창작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앞으로 내가 새로 창작한 <이춘풍전>, <정선애화>와 같은 신곡도 발표할 예정이다.
허덕선이라는 분은 오래 전에 이북에서 이름을 날린 전설적인 명창이다. 소리를 아주 잘했다고 하며 짓거리(지적, 웃음거리)에도 능했다고 한다.
김관준 명창은 <배뱅이굿>, <안중근가>, <전쟁가>, <제전> 등을 지은 서도소리의 대명창이다. 만년에 박수 무당으로 살았다는 말이 있다. 김관준 명창은 평안남도 용강 출신이며 그 아들 김종조 씨를 비롯해서 최순경 씨, 이인수 씨와 같은 명창을 길러냈다.
김종조 씨는 사람들이 이북 말씨로 흔히 ‘김종도’라 했다. 김종조 씨도 그 아버지 김관준 명창과 마찬가지로 아마 용강 출신일 것이다. 김종조 씨는 소리를 아주 잘했고 인기가 대단했다. 김종조 씨는 소리하는 사람으로는 드물게 중학교 정도까지 졸업한 학식있는 명창이었다. 김종조 씨는 만년에 길거리에서 소리를 팔았다 한다. 아편 때문에 만년에 패인이 되어 무척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중국을 통해 아편을 들여와서 남용하여 몸이 망가진 것 같다.
최순경 씨는 평남 순천에서 태어났으며 이북에서 인기와 명성이 대단했다. 인기 면에서만 보면 최순경 씨가 김종조 씨의 명성을 능가했다.
나의 스승인 이인수 선생님은 나보다 20세 가량 연상으로서 1890년대 후반에 평남 용강에서 태어나셨다. 이인수 선생님은 용강, 진남포, 황주 등지에서 활동하셨고 특히 진남포에서 오랫동안 사셨다.
이인수 선생님은 인정이 많았고 성품이 무척 너그러웠다. 그 선생님의 부인은 기생 권번 출신이며 소리를 잘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인수 선생님은 얼굴이 약간 얽었으나 소리 실력 만큼은 당대 최고의 서도소리 명창으로 꼽힐 정도로 대단했다. 이인수 선생님의 특기는 <배뱅이굿>과 <병신 난봉가>였다. 그리고 개소리 흉내, 장고 돌리기, 꼽추춤 등의 짓거리를 잘하셨다. 내가 장기로 삼고 있는 짓거리들은 거의 모두 이인수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인수 선생님은 자손이 없어서 만년에 외로워 하셨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공연을 하여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자주 한탄하셨다.
내가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울 당시는 1930년대 후반, 대동아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심한 경제고에 시달렸다. 그런데 당시 황주는 사람들이 대체로 잘 살았고 소문난 부자들이 많았다. 나는 당시 황주에서 이인수 선생님을 모시고 부자집에 다니면서 함께 공연을 하곤 했다.
이인수 선생님과 비슷한 연배인 김종조 씨, 최순경 씨 같은 명창들은 여러 장의 유성기음반을 남겼다. 그런데 이인수 선생님은 단 한장의 음반도 남기지 못하고 작고하셨다. 나는 그 분의 제자로서 이 점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된다. 이인수 선생님도 음반을 취입하지 못한 것을 만년에 아쉬워 하셨다. 이인수 선생님은 40대 후반(1940년대 중반)에 작고하셨다.
경기소리 명창 최정식 씨와 최경식 씨는 시조, 가사 등 정가에 능하였고 경기민요를 잘 불렀다. 두 명창 모두 나보다 15세 가량 연상(1902년 무렵 출생)이었고 광복 후까지 활동하였다.
서도소리 명창 김칠성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이며 황해도 출신이다. 김칠성 씨는 사리원, 개성권번 등에서 소리 선생을 했고 유성기음반을 여러 장 취입했으며 인천에서 작고하였다. 김칠성 씨는 약간 쉰 듯한 성음으로 소리하는 것이 특색이다.
서도소리 명창 양희철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황해도 사람이다. 양희철 씨는 해주에서 소리 선생을 했으며 나와 한 무대에서 함께 활동한 적이 있다.
서도소리 명창 민칠성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사설 방아타령>을 잘 불렀다.
경서도소리 명창 신해중월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이다. 신해중월 씨의 남편은 국립국악원에 재직했던 거문고 풍류 명인 김상기 씨다.
경서도소리 명창 백모란 씨도 신해중월 씨와 비슷한 연배인 것으로 보였는데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이었다.
내가 신해중월 씨와 백모란 씨를 처음 본 것은 내 나이 20대 초반에 한일관에서였다. 거기에는 두 분 외에도 비슷한 연배의 여류 명창이 한 분 더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암튼 그 때 나는 그 분들 앞에서 내 소리 솜씨를 선보인 기억이 난다.
서도소리 여류 명창 장학선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평양 사람이다. 장학선 씨는 <수심가>를 기가 막히게 잘 불렀고 일제 때 인기가 대단했다. 장학선 씨는 박수 무당과 함께 살았고 1972년 무렵에 왕십리에서 작고하였다.
서도소리와 신민요의 명창 김주호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평양 사람이다. 김주호 씨는 일제 때 <맹꽁이타령>을 크게 힛트시켜서 유명해졌다. 김주호 씨는 서울에서 인기가 대단했으나 이북에서는 알아주지 않았다. 김주호 씨는 서도소리를 정통으로 하는 이북의 대명창들한테는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 이북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도소리를 하는 명창으로 알려진 김진명 씨는 나보다 3세 연상이다. 김진명 씨는 예전에 내가 이인수 선생님 문하에 있을 때 자주 본 적이 있다. 김진명 씨는 어떤 분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는지 모르겠으나 이인수 선생님에게 많이 찾아왔었다. 김진명 씨는 얼굴이 아주 잘 생겼고 소리를 잘하여 일제 때 기생들의 우상이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남북 통일 범민족음악회 때 김진명 씨가 서울에 왔는데 그 때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만난 적이 있다. 김진명 씨의 형은 현재 남한에 살고 있다. 남북 통일 범민족음악회 때 김진명 씨와 함께 와서 공연한 김관보 씨는 대중가요 작사가 조명암 씨의 부인이다.
서도소리 명창 한경심 씨는 나와 비슷한 연배였으며 평양 사람이다. 한경심 씨의 남편 또한 서도소리 명창이었다.
백운선 씨는 옛날 명창과 근래 명창, 동명이인으로 두 사람이 있다. 옛날 백운선 씨는 서도소리를 했던 명창이다. 근래 백운선 씨는 경기소리 명창인데 나보다 7,8세 연하(1924년 무렵 출생)로서 현재 살아있다.
박부용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1907년 무렵 출생)으로서 경기민요와 <수심가>를 잘 불렀다. 박부용 씨는 신불출 작사, 문홍월 작곡의 <노들강변>으로 인기를 끌었다. 박부용 씨는 4,5년 전에 서울에서 작고하였다.
이정렬 씨와 이반도화 씨는 나와 비슷한 연배이며 1960년대 후반까지도 활동한 서도소리 명창들이다.
193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에 유랑 극단에서 활동한 고준성 씨는 재담을 옛날식 민속조로 잘하였다. 고준성 씨는 나보다 6세 가량 연상(1911년 무렵 출생)으로서 경기도 양평 사람이며 1950년대 초반에 양평에서 작고하였다.
1940∼1945년 무렵, 약 5년 동안 나와 함께 신불출 씨의 극단에서 활동한 김계춘 씨는 황해도 백천 사람이다. 김계춘 씨는 나보다 몇 살 연상으로서 내가 누님이라고 불렀다. 김계춘 씨도 나와 마찬가지로 배뱅이굿이 특기였다. 나의 경우는 관중을 웃기는 해학적인 배뱅이굿이라면, 김계춘 씨의 경우에는 나와 대조적으로 구슬프게 소리를 하여 관중을 울리는 배뱅이굿이었다. 김계춘 씨는 김백소 씨와 만년에 함께 살았으며 서울 영등포에서 과음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만담가 신불출 씨는 나보다 10세 가량 연상이다. 신불출 씨는 일제 때 인기가 대단하여 그 분의 단체에 취직했다 하면 다들 출세했다고 부러워 하였다. 나는 신불출 씨 단체에 입단하면서 공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실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40년대 전반기에 나와 함께 신불출 씨의 극단에서 활동한 박천복 씨는 나보다 5,6세 연상(1911년 무렵 출생)으로서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고 1950년대에 폐병으로 작고하였다. 박천복 씨는 박춘재 명창과 최경식 명창의 문하에서 경기민요와 재담 등을 배웠다. 박천복 씨는 목성음은 썩 좋지 않았으나 민요를 퍽 구성지게 잘 불렀고 꼽사춤, 만담으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박춘재 명창은 광복 후 나와 함께 공연을 한 바 있다.
1940년 무렵에 나와 함께 유랑 극단에서 활동한 김봉업 씨는 줄을 잘 탔고 해금을 잘 연주했다.
문영수, 최홍매, 한인오, 이문원, 서산호주, 김밀화주, 김패수, 표연월, 최섬홍, 이초선, 김춘홍, 이영산홍, 김옥엽, 이진봉, 박월정, 김인숙, 장금화, 김복진, 홍소월, 김부용, 길진홍, 손진홍, 김향란, 설중매, 이은영 씨 등 그밖에 다른 경서도소리 명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신민요 가수 선우일선 씨는 평양 사람이다. 대중가요 가수 김정구 씨의 형인 김영환 씨는 일제 때 영화극 설명의 일인자였는데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201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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