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는 『제11회 국립남도국악원 학술회의-남도 굿, 삼현육각과 예인을 만나다』(전라남도 진도:국립남도국악원, 2014년 6월 28~29일) 90~165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화순의 음악 문화와 예인(2)
- 현지조사와 실증자료 중심 연구 -
글·사진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
1. 화순 음악 문화
(1) 화순의 음악 환경
(2) 화순 국악 명인
2. 화순 관련 국악인 대담 내용
(1) 판소리 명창 박송희
(2) 판소리 명창 성우향
(3) 판소리 명창 성창순
(4) 판소리·전통춤 명인 성희경
(5) 판소리 명창 신유경
(6) 무악 명인 조도화
(7) 판소리 명창 조순애
(8) 발탈·판소리·국극·민요 명창 조영숙
3. 화순 능성신청 조사 내용
(1) 능성신청 위치와 사진자료
(2) 능성신청에 대한 증언자료
4. 화순 관련 국악 주요 음반과 문헌, 맺는말
(1) 화순 관련 국악 주요 음반
(2) 화순 관련 국악 주요 문헌
(3) 맺는말
-------------------------------------------
(3) 판소리 명창 성창순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12년 6월 28일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국악방송 스튜디오.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판소리 인간문화재 성창순 명창 편. 판소리 명창 성창순(좌측)과 노재명 대담 방송 장면.
노재명: 국악 이야기만 여쭤 보드래도 이 90분이 모자랄 것 같은데 생년은 몇 년도.
성창순: 34년.
노재명: 1934년 생이시구요. 예명은 따로 안쓰시구요.
성창순: 없어요. 소정(素汀), 호는 있어요. 글을 내가 쪼끔 써서 흴 ‘소’자, 물가 ‘정’자 소정이라고 했지요.
노재명: 예, 부친 되시는 성원목 선생님께서는 1912년 무렵에 태어나셔 가지고 판소리 명창, 창극, 고수 활동을 이렇게.
성창순: 네, 근데 우리 아버님이 연극을 처음에 시작을 하셨는가 보데요. 그래 갖고 연극을 하면서 하면은 창극에 소리를 해야 되잖아요. 근데 아버님은 목이 나빴대요. 근데 인자 왜 그 아버지 활동허신 것을 제가 모르냐면은 아버님이 늦게 장가를 가셨대요. 그래 갖고 우리 형제들이 늦게 태어난 거에요. 그래서 아버지 활동을 잘 몰라요. 그래서 인자 한승호씨도 이제 돌아가셨지요. 그 말을 해줄 수 있는 분은 그런 분들인데 한애순 선생님도 광주에 계신, 그 어른도 그렇게 뭐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고 그래서 잘 듣지를 못했어요 아버지 그 활동에 대해서는. 그래 그냥 이 소리를 못하게 했죠. 그 때 시절에만 해도 너무, 그리고 형제들도 그 막 별로 환영 안했고 그랬죠.
노재명: 네, 그래서 인제 국악 한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대가 심하셨구요.
성창순: 그랬죠 인제 아버지는 너무 그 세계를 아시니깐 더 못하게 말렸고 우리 어머니는 그래도 좀 깨치셨던 것 같애요. 지가 노력하면은 무엇이 될지 모르는데 거 굳이 시집만 보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지가 하고 싶은 거 하게 좀 승낙해 달라고 그냥 어머니가 얼마나 참 고생하셨어요 정신적으로. 그 동네가 근데 제 사는 동네가 전부 다 국악인들만 사는 동네였었어요. 광주 금남로였었어요.
노재명: 아예, 광주에서요.
성창순: 네, 그 때 그 동네가 앞집에도 소리가 나고 옆집, 옆집. 뒷집만 아니었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항시 좋은 줄만 알지 뭣인지는 몰랐지만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듣고 자란 거죠.
노재명: 예, 그래서 그 영향을 받아서 아마 자연스럽게 국악을 하게 된 것 같다.
성창순: 예, 그래서 나중에는 그냥 학과 공부하기 싫어 가지고 그 쪼끔, 약간 끼가 있었든 것 같애요. 흐흐 외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신 걸 들어보면은 연극 같은 거 보면은 막 젓가락만 봐도 벽에 가서 뚜들고 그랬대요 그 흉을 낸다고. 또 발레를 보면은 꼭 꼬두발 딛고 다니면서 이렇게 흉을 낸다고 그러고 쪼끔 맹랑했던 거 같애요 애기 때.
노재명: 그러면 그 국악에 이제 본격적으로 입문하신 나이는 몇 살 때쯤에 하셨나요?
성창순: 아, 그러니까 아버지 모르게 15, 16살 그 때 그쯤 될 거에요 15살 정도.
노재명: 네.
성창순: 그래 갖고 나중에 들통이 나서 인제 또 붙들려서 와서 이제 밥 안먹고 울고 불고 하니까 결국은 아버지가 지, 졌죠. 지고 그냥 내 자식 아니라고 이제 이렇게. 그러고 어머니, 아버지 싸우신 걸 봐서 알어요. 그런데도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할라고 했었나 몰라요.
노재명: 뭐가 그렇게 국악이 좋으셨을까요?
성창순: 긍개 뭣이 뭣인지 모르지. 몰르는데 그니까 조기 교육이라는 말이 그 말이 아조 실감나는 일이라니까요. 그냥 아침에 눈만 뜨문은 소리가 나고 가야금 소리두 나고 그런 거.
노재명: 예, 그 부친께서는 김봉학 명창, 그 분한테 판소리를 공부하셨다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성창순: 오.
노재명: 부친께서 소리하시는 것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성창순: 목이 나쁘니까 그 몰, 몰랐어요.
노재명: 예.
성창순: 그 연극 할 때 뭐 그 놀보 역할이라든가 나 애기 때 이제 학교 다닐 때 그 인자 공연하신 것얼 보면은 그랬든 거 같구. 저 신관 사또 역할, 뭐 그런 거, 그러신 거 같고. 그 저 박후성씨라구 연극 잘하고 그 분도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절 보고 아버지 목이 안나온 걸 소원 풀었다고 인자 이러면서 날 보고 칭찬을 해주고 인제 그런 일이 있습니다만. 목이 경장히 나쁘셨든 거 같애요.
노재명: 네, 부친께서 창극 활동을 하셔서 국악인들 많이 집에도 놀러 오시구요.
성창순: 그렇죠. 그러고 인자 정남희씨라구 그러던가.
노재명: 가야금 하시는.
성창순: 그 저 월북하는, 응 저 가야금. 그런 분이라든가, 오태석씨라든가, 소리하는 저 김연수 선생이라든가, 또 임방울 선생이라든가 이런 분들이 다 형님이라고 그러고 뭐. 박동실씨, 한애순씨, 김소희 선생, 그 공부했던 그런 분들, 그 인자 형님 동생하고. 애기 때 심부름 가면 큰아버지 집이라고 그러고 형제 같이 이렇게 사셨든 거 같더라구요.
노재명: 그리고 이제 판소리 인간문화재 한승호씨.
성창순: 예, 한승호씨, 한갑득씨.
노재명: 그리고 아쟁.
성창순: 한일섭씨.
노재명: 네, 그런 분들이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 후배님들이 되시겠죠.
성창순: 예, 그렇게 되겄지요.
노재명: 특히 한일섭씨 같은 경우는 친척간이시구요.
성창순: 예, 저 양자로 왔어요. 외가가 아들이 없어요. 그래서 삼춘이라구 아이고 그 냥반두 너무 너무 재주가 아까워. 너무 머리 좋고 못하는 것이 없어요. 연극에, 연극도 잘하시고 작곡도 잘하고 전부 <동백꽃타령>이다 뭐이다 민요, 신민요덜얼 거의 다 하다시피 했고 아쟁을 그렇게 잘 타고 정말 참 깜짝 놀랠 참 좋은 분덜이 결국은 모다 병환으로.
노재명: 예, 그러면 그 한일섭 명인께서는 성창순 선생님의 외삼촌 되시구요.
성창순: 그렇죠. 예.
노재명: 그러면 15, 16살 때 국악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신 것은 어디서 어느 분한테 배우기 시작하셨을까요?
성창순: 배운 것이 아니고 조선창극단을 들어갔는데 들통이 나서 인자 잡혀 왔고 그 뒤로 김연수 선생님이 단체를 만들어서 흥행을 하러 다녔을 때 거기를. 그러고 중간에 박후성씨가 만들은 거기도 조끔 다녔고 그렁개 그 때는 인자 주연 역할이 아니고 어리니까 장화홍련전의 단심이 같은 거, 춘향전의 향단이 같은 거, 뭐 그랬을 거에요.
노재명: 그러면 맨 첫 번째 은사님, 스승은 누구라고 볼 수가 있을까요?
성창순: 어, 우리 동네 거 북동에서 공기남.
노재명: 아, 월북하신.
성창순: 월북하신, 예.
노재명: 판소리 명창 공기남씨요.
성창순: 예, 예, 예. 그 으른한테 어머니가 인자 공부를 시켜 볼라고 본격적으로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가서 인제 무엇을 시켜 보았든가 보죠. 그랬드니 인자 그러구는 나는 나왔는데 어머니허구 말씀 대화 중에 쟤는 소질 없으니까 그냥 시집 보내라구 이렇게 된 거에요.
노재명: 아이고 예.
성창순: 그니깐 얼마나 어린 마음에 충격이 컸겄어요. 증말로 그냥 참, 참 송곳니를 갈았지. 아직 해보지도 않앴는데 소질 없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지 정말로 그냥 종일 울었지요 그 소리 듣고. 그래서 더 마음이 굳었든 거 같애요.
노재명: 그 말씀이 아마 선생님이 성격이 화통하시니까 이렇게 솔직하게 말씀하시지만 평생에 이렇게 응어리가 됐던.
성창순: 그렇지요.
노재명: 막 이를 악물게 했던.
성창순: 그럼요.
노재명: 아마 추억이신 거 같습니다.
성창순: 그럼요.
노재명: 네, 그래서 이제 공기남 선생님한테는 잠깐 배우시구서.
성창순: 단가 하나 허고 창극단에 들어갈라문 소리를 해야 허니까 단가 하나 허고 그 저 심청가의 유언 대목, 진양 하나 허고 그 두 대목을 갖고 창극단에 들어간 셈이죠.
노재명: 예, 그러니까 공기남씨가 월북하기 직전에 아마 40년대쯤에 아마 배우신 것 같습니다.
성창순: 예, 그랬을 거에요.
노재명: 예, 그러구 이제 공기남 선생님한테 배우시구 나서 그 다음 스승님은 또 누구실까요?
성창순: 그리고 김연수 선생님.
노재명: 동초 김연수 명창님이요.
성창순: 예, 예. 근데 인자 그 배우는 과정이 정말 옛 어른덜은 참 지혜가 있으시구 교육두 그렇게 빤듯허게 해주실 수가 없어요. 왜 그냐하면 첫날은 한 사람이 공부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도 그냥 흘려 보냈고 그 이튿날 두 사람 목소리가 들리드라구요. 그래서 보니깐 모다 다 고인 됐네요. 처음에는 박옥진이가 했고 그 이튿날은 오정숙이가 “왼갖 생각~” 그 정정렬 바디로.
노재명: 그 <이별가>요.
성창순: 예, 그 춘향가를 배운 때고 그래 갖고 인제 3일만에 가만두라고 인제 그러신 거에요, 알고 찾아 오두록. 그래 가지구 3일만에, 근데 내가 제일 빠져요. 그 때에는 오정숙이가 명창이었어요. 그 막간으로 연극 하고 나면 거 막 내리고 앞에 가서 그 뭐, 어깨를 위에 얹고 헌 것이 <사랑가>를 했든 거 같애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참 소리를 잘했어요. 그 어른들이 하는 거 다 듣고 헝개 정말로 오정숙씨만 해도 애기 때 참 고생허고 아버지 등에서 참 컸어요. 그렇게 음, 했다가 인자 정말 죽마고우 친구지요. 박옥진이도 그 때 결혼하기 전인데 키도 가는 먼저 크고 지금 김성녀가 딸이네요. 그 때 애기 뱄을 때에 얼마나 흉을 보고 막 그랬, 흐하하 지금 생각허니 어이가 없네요.
노재명: 예, 지금 중앙대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김성녀씨 모친.
성창순: 예, 큰딸이지요. 모친 얘깁니다. 네. 참 그렇게 모두 일찍 갈 것 같으문 쪼금 빨리 옛날 얘기하면서 한번이라도 만나볼 걸 시간에 쫓겨 가지고 아휴 정말 참.
노재명: 네, 그러면은 그 분들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 친구로.
성창순: 그렇지요. 죽마고우 친구는 세 사람밖에 없었어요.
노재명: 네, 오정숙씨는 동초 김연수 명창의 수제자신데.
성창순: 그 공부허게 된 동기가 나 땀에 한 거에요.
노재명: 아, 그러셨어요.
성창순: 긍개 “소리, 판소리 배우는 거는 친구 자네 땀새 시작을 했네” 그렇게 얘기를 헌 것얼 내가 들어서 인제 알고 박옥진씨는 그냥 완전히 그 사람은 인물도 예쁘고 연기도 좋고 형제들이 많이 있지요, 성녀 지 형제들이. 그래서 지금도 “이모! 이모!” 그래요. 애기 때 이모라고 해 놓으니까.
노재명: 그 박옥진씨는 이제 국극 세계에서 아주 여왕으로.
성창순: 아, 그랬지요. 아조 화려했지요. 예.
노재명: 네, 그러시구요. 그러면 동초 김연수 명창께는 어떤 소리 배우셨을까요?
성창순: 그니까 “왼갖 생각~” 그 춘향가를 배왔죠.
노재명: 예, 춘향가를.
성창순: 그러문요. 애기 때 인제 그것만 하구는 그 뒤로는 안하고 그러고는 인자 단체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그 춘향가를 제법 배웠던 것 같애요. 긍개 그거를 광주에 또 공.
노재명: 공대일씨요.
성창순: 공대일씨!
노재명: 예.
성창순: 그 어른이 “김연수 선생한테 배운 춘향가럴 가리켜 도라. 나는 박동실 선생의 그 심청가럴 가리켜 주마.”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 갖고 그 어느 한 대목을 아마 그랬을 거에요.
노재명: 아, 공대일씨한테 배우셨어요?
성창순: 예. 공대일 선생한테 그 심청가, 거 물에 빠진 대목 아마 그럴 거에요.
노재명: 예,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
성창순: 예.
노재명: 배우셨구요.
성창순: 예, 예.
노재명: 광주에서는 공대일씨가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신 것으로.
성창순: 그랬지요.
노재명: 알려져 있습니다.
성창순: 정말로 참 고생도 많이 허시고 그렇게 정확허고 이를테면 고지식하고 정직헌 분이 없었어요.
노재명: 예, 양심적이시고.
성창순: 아, 그럼요. 그니깐 없는 것이 죄지 거 참 고생 많이 허셨네요 정말. 인제 그러고는 김소희 선생님한테. 그러고 인자 소리가 싫어져 가지고 중간에 아이 이거 안허고 싶다 이래 가지고 가야금을 좀 했고 거문고럴 그 때 인자 막 해산되고 단체덜이 모도 슬 자리가 단원덜이 없을 때에요. 그 때가 50년대 자유당 때, 그 무렵에 다 모도 뻐그러졌을 때에요 그 때. 그래 인자 부산으로 내가 친구 따라서 가서 팀이 돼서 그렇게 불려 대니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럴 했어요.
노재명: 그리고 장영찬씨한테는 혹시 어떤.
성창순: 단가, 단가 하나 저, 저 <적벽부>라는 단가 하나 배운 것 같네요.
노재명: “임술지~” 하는 단가요.
성창순: 예, 예, 예. 많이 불렀지요.
노재명: 그러면은 혹시 고거 가능하시면 기억 나시는 만큼 잠시 부탁을 드릴 수 있을까요?
성창순: 예, 예, 괜찮애요.
(성창순 단가 <적벽부> 창, 중모리, 무릎 장단) “임술지(壬戌之) 추칠월(秋七月) 기망(旣望)으 적벽강(赤壁江) 배를 띄어 임기소지(任其所之) 노닐 적으 청풍(淸風)은 서래(西來)”
성창순: 이렇게 나가죠.
노재명: 예.
성창순: 알지요. 많이 배웠고 모도 좋아해요 그 단가럴 모도.
노재명: 예, 이 단가가 정정렬 명창이.
성창순: 에서 나왔을 겁니다.
노재명: 작곡하셨다고 이렇게 알려져 있는 그런 유명한 서편제 단가가 되겠습니다.
성창순: 예, 그렇습니다.
노재명: 장영찬 선생님 이렇게 말씀 나누다 보니까 그 생각이 나는데 예전에 세종상, 그 성창순 선생님께서 수상하실 때.
성창순: 그랬죠. 아휴 그 68년도.
노재명: 예, 그 장영찬씨, 한애순씨, 김준섭씨
성창순: 예.
노재명: 이렇게 나오셔 가지고 그 때 성창순 선생님께서 1등.
성창순: 그렇지요.
노재명: 하셨지요.
성창순: 예. 그 때 한참 소리를 막 잘했을 때그든요. 그랬으니까 내가 1등을 했지요.
노재명: 그 때 선배 되시는 김준섭씨, 장영찬씨, 한애순씨.
성창순: 으으음, 한애순씨나, 김준섭씨는 그 때 인자 건강이 나뻐서 그랬을 때에요. 그래 인자 그런 분덜이 막 자존심 상허지요. 까마득한 사람이 올라오니까. 그래서 한승호씨는 그냥 기권해 버렸다니까요. 그 때 참 서울에서 처음 그 세종상을 만들었을 때네요.
노재명: 그래서 그 쟁쟁한 선배들을.
성창순: 흐허하하 그러니깐.
노재명: 어떻게 경쟁이 붙으셨는데요.
성창순: 앞의 전망을 보고 줬겠죠.
노재명: 그렇게 1등을 하셨던 영광스러운 기억이 되겠습니다.
성창순: 예, 예.
노재명: 그러면은 이제 공대일씨한테 광주에서 소리를 배우시다가 서울 오신 것은 몇 살 때신가요?
성창순: 20살, 21살 때 부산에서 김원술씨라고 계셔요.
노재명: 예. 판소리 명고수.
성창순: 아조 멋쟁이, 예. 그 어른이 국악협회장도 허시고 소리도 배왔다고 근데 영락없이 거 흉도 내고 허신 분넨데 그 분이 국악인덜얼 아끼는 마음은 누구 못지 않하게 컸어요. 저 사람이 성공얼 할 수 있겄다 허면은 뒷바라지라도 해서 참 키울라고 하는 그런 참 고마운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거든요. 긍개 그 냥반이 “내가 뒷바라지해 줄 테니까 서울 올라가서 본격적으로 공부 좀 하시요.” 날 보고 막 그래요. 그래서 뭐 이제 20이 넘었는데 뭘 그러고 저러고 해. 그러고서 이제 마음이 늙은 거야. 그냥 그 때 인자 슬 자리도 없고 국악인이라고 뭐 대접 받을 수도 없고 뭐, 뭐 아조 그랬었어요. 긍개 소리는 그냥 안하고 악기로만 했제. “에이 소리 고만해야지. 뭐, 대접도 안하는데” 그렇게 포기럴 헌 거요. 그러고 있을 때 인자 그 김원술씨가 부산에 오시게 되어 가지고 저한테 그래요, 올라오시라고. 서울 가서 계셔야 헐 분이 여가 있다고 안된다고. 그래서 충동질을 헌 거지요, 얼른 말을 허자먼. 그렇게 올라와서 박초월 선생님이 어느 그 저, 법관 허셨던 어른이 판소리럴 그렇게 좋아허신다고 어느 자리를 만들어 가지고 제자들을 좀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인자 내가 거기럴 끼게 됐는데 그 때 인자 소리는 죽은 한농선이, 또 박봉선이, 성우향이, 세 사람이고 다 내 또래잖아요. 나는 인제 소리는 안하고 거문고를 탔을 때거든요. 그 때 거문고럴 아주 잘 탔어요. 그래 저를 먼저, 제일 먼저 거문고산조럴 시키더라구요. 그래서 경장히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너무 너무 거 자존심이 상해서 역시 그, 소리가 제일이구나.
노재명: 예전에는 실력별로 이렇게 순서를 매겨서 했으니까요.
성창순: 그렇죠, 그렇죠. 그니까 나는 아예 악기럴 헌 사람으로 치고, 속에서 부글부글 끌어서 살 수가 없는 거에요. 그 이튿날 당장에 양단 저고리에 한감 딱 떠 가지고 김소희 선생님 찾어 갔지요.
노재명: 아, 예.
성창순: 그래 가지고 선생님 저 공부헐랍니다. 그래 갖고 거문고 내땡겨 버리고는 소리럴 그 때부터 인자 막 시작얼 해서 심청가 그 또 인제 뭐 흥보가도 배우고 정말로 그런 명창이 없어요 정말.
노재명: 그래서 서울 올라오시게 된 계기가 김원술씨, 권유하셔 가지고.
성창순: 그렇죠. 그런 영향이 있었지 싶으네요.
노재명: 그리고 서울에 오셔 가지고 거문고를 처음에 하실 때는 김난주씨한테 처음, 맨처음에 배우셨나요?
성창순: 그렇지요. 김난주, 부산에 계신 분. 인제 한갑득 선생님의 수제자라구 그러시두만.
노재명: 그리고 나중에 한갑득 선생님한테 서울에서도 배우셨구요.
성창순: 그니까 서울에 와서 그 짧은 산조럴 배왔어요. 너무 참 이뻐허시구 좋아 가지구, 인자 약주를 좋아하시니까 딱 주안상 딱 봐서 놔놓고 인제 드시게 하고 아 그냥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셔.
노재명: 그리고 그 때 원옥화씨한테 강태홍류 가야금산조를 배우신 거구요.
성창순: 예, 그렇죠. 아주 가락두 좋을뿐더러 그 바디가.
노재명: 그러고 김영철씨한테 또 철현금을 배우셨는데요.
성창순: 부산서 배웠지요.
노재명: 아, 부산에서 배우신 거구요.
성창순: 예.
노재명: 김영철 선생님, 줄타기 인간문화재셨는데요 그 분한테 철현금을 배우셨는데 철현금은 하와이안 기타를 한국식으로 좀 개조를 해 가지고.
성창순: 처음에 그 어른이 키타럴 가지고 줄을, 산조 줄을 맞춰서 연구를 허시면서 이 저, 저 구르무곽인가 뭐 그런 거 있어요. 그걸로, 술대는 만년필, 그, 그걸로 허면서 그 청얼 맞추고 그래 가지고 그걸 연구럴 해서 산조럴 만드셨는데 그 악기를 김영철 선생님이 만드셨어요. 키타 파는 그 악기점에 가 가지고.
노재명: 예, 그렇게 인제 그 선생님께서 판소리에 처음에 좀 환멸을 느끼셨다가.
성창순: 많이 느꼈지요, 75년도에 특히.
노재명: 거문고로 가셨다가 다시 판소리로, 그 오기. 또 공부 욕심과 끈기로 이렇게 결국에는 명창이 되셨는데요.
성창순: 긍개 대접두 없고 특히 정말 보성 공부를 갔는데도 애기덜이 보고 기생 쩌그 간다 이렇게 내 귀에 들어와 가지고 음, 아이고 이거. 그러고 인자 막 어설프잖허게 하니깐 나를 쥐뜯구 이러나 부다. 그냥 없는 말만 맨들어서 사람 막 괴롭히고 그래서 정말 75년도에 안해 볼라 그랬어요. 했다가 안해 불라고 며칠이 지났는데 취입이 들어왔어요, 레코드 취입이. 운명적으로 헐 수밖에 없구나, 그러고 다시 시작헌 것이 긍개 모든 걸 다 내버리고. 그런 고초가 없을 수가 있겠냐, 쩝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노재명: 그렇게 해서 성창순 선생님 일대기 책에 보면은 책 제목이 ‘자네는 도둑인이다’ 이런 이제 표현을 하신 명창 분이 계십니다.
성창순: 흐흐흐흐흐흐.
노재명: 그런 말씀을 해주신 은사님은 누구신가요?
성창순: 박록주 선생님이요.
노재명: 아, 춘미 박록주 명창께서.
성창순: 긍개 그 삼막사에 백일 공부 들어갔을 때 어느 대목에 우조를 하시는데 도저히 그 흉이 안돼요. 안되드라구요. 선생님 한번만 더 해주세요. 아무 말씀이 없드니 이 양반이 안경 쓰셨거든요, 눈이 하나가 그러셔서. 그냥 눈치를 이렇게 허시면서 “니가 소리 도둑년 아니가!” 경상도시거든요. 그래서 인자 그 책을 쓸 때 그 말을 쓰는 게 재밌겄다 그래 가지고 소리 도둑년이라고 그렇게. 참 무궁무진허신 분이고 좌우간 여류로, 다 떨어놓고 최고의 명창이에요. 깨끗허고 정직허시면서 티 하나 묻지 않게 정말 참 곱게 사셨던 분이에요. 소리 음도 처음에는 남자 같애 가지고 별로 그렇게 매력을 못느꼈는데 배와 볼수록 이 흥보가는 성음으로 허기 때민에 더 어려와요. 막 기교를 부리고 그런 게 아니에요 흥보가는. 그래서 참 특이해서 우리 애들한테 가르킬 땍에는 이건 성음으루 허니까, 그러니까 더 어렵다고 지기덜도 참. 그래서 지금 11월 달에 흥보가 완창얼 애덜 데리고 발표할 겁니다 보성서.
노재명: 아, 올해 11월에 전라남도 보성에서 흥보가 발표회를 하시구요.
성창순: 예.
노재명: 그 때 안양 삼막사 백일 공부가 판소리계에서는 아주 전설적인 그런 백일 공부로 회고가 되고 있습니다.
성창순: 예, 흐하하.
노재명: 그 때 한농선씨도 같이.
성창순: 그랬지요. 그 때 한농선씨가 보성 공부 들어갈 땍에 왜 나는 안데리고 갔냐고 그냥 얼마나 나럴 진천을 하던지. 그래서 요, 요번에넌 저 삼막사 백일 공부 들어가는데 당신 들어가, 안들어가 하니까 내가 왜 안들어가냐고. 그래 가지고 들어가서 백일 공부를 하는데 서울이 그리워서 못견디고 결국은 먼저 내려가고 나는 저 백일도 못채왔다고 왔다고 그 말 안들을라고 고생이 돼도 안가고 그러고 박록주 선생님도 그 때 환갑이셨어요. 내려가시고 육십 하나셨던가벼 그 때. 그래 갖고 우리들이 내려가 갖고 환갑 새드리고 그랬네요.
노재명: 그래서 그 때 그 안양 삼막사에서 백일 공부하실 때 성창순 선생님하고 한농선씨 이렇게 찍으신 사진을 보면은 공부에 너무 열중하시다 보니까 아주 그 때 다 미인 그런 명창들이신데 머리가 이렇게 산발머리에 옷차람이 아주 남루한 그런 상태로 이렇게.
성창순: 흐하하하하하하. 그렇죠. 그 뭐냐 적삼에다가 통초마 해서 그렇게 입고 뭐 그런 것이 뭐 문제가 안됐고 요는 그러자 거, 고시 공부하는 학생덜이 같이 좀 얘기도 허고 밥도 같이 좀 먹고 싶고 하는데 그냥 말도 못붙이게 하고 이러니까 소리 듣기 싫으니깐 저 사람덜 내보내라고 막 그냥 얼마나 막 데모를 하고 그랬다니까요.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인 성창순 명창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 그렇게 이제 서울에서 만정 김소희 선생님, 또 춘미 박록주 명창한테 심청가, 흥보가 이렇게 두루 배우셨구요 보성의 그 정응민 명창한테 소리 배우신 것은 언제쯤이신가요?
성창순: 그 때 63년도에 성우향씨하고 같이. 인제 어느 날 김소희 선생님이, 그 때 공부허고 있을 땐데 정권진 선생님이 오셨어요. 정응민 선생님의 아드님 되시지요. 그랬는데 그 선생님이 훌륭한 선생님이니까 나한테는 나중에 배우고 수궁가를 좀 배우자. 그러셔서 그게 인연이 돼서 때는 이 때다 하구는 언제 간다구 이제 약속을 어느 날짜에 했는데 그 때 막 겨울인데 섣달 스물 여드렛날이었어요 음력으로. 그래 갖고 그냥 눈이 무릎 위에까지 올라와서 리어카에다가 거, 쇠가 막 큰 거에 사철 옷을 집어 넣고 이불하고 이러니까 짐이 상당히 많지요. 긍개 못가 가지고 지게에다 짊어지고 우리가 거, 뒤에 따라서 이제 보성을 들어갔는데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모다 가족덜이 다 모였드라구요. 유언 같이 그런 것얼 한다고 그래서 큰 일 났더라구요. 공부할려고 들어갔는데 그래서 나는 그냥 정권진 선생 계시니깐 그렇게만 생각을 했는데, 할아버지가 공부하러 왔습니다 했더니 다시 회생이 되신, 되신 거에요.
노재명: 네.
성창순: 그래 가지고 참 제가 인자 법을 좀 어겼지요. 냄비에다가 주사 바늘 끓여 가지고 이제 이렇게 저, 숨 가쁜 거, 천식이 이렇게 있어서 인자 그 천식을 가라앉히는 그런 약이었던 거 같애요. 긍개 이제 너무 말르셔서 이렇게 손으로 붙들어야 이렇게 잡어야 바늘이 들어갈 정도로 그렇게 말르셨었어요. 그렇게 인자 병환을 해드리면서 공부를 어렵게 했어요 정말.
노재명: 그러면 1963년에 들어가셔 가지고 기간은.
성창순: 64년에 나왔죠.
노재명: 예, 한 1년 정도 배우셨구요.
성창순: 예, 예. 그러고 인자 우향씨허고도, 선생님이 어려우니까, 뜰이 높아요 집이. 옛, 옛 집이라. 별호가 성우향씨가 우렁이에요. “우렁!” 그러면 “어이!”
노재명: 하하하하하하.
성창순: 가까이 서로 이렇게 그, 저, 담 하나밲에 없었으니까 내가 방을 하나 얻어서 자취한 집하고 선생님 집하고 그래 인제 오라 해 갖고는 만나서 이제 장터 가서 우동 한 그릇씩 먹세. 소주 한잔 먹고 오세. 그러고 인제 가서 대체 누구나 보면 그거 흉 보니까 두꺼운 그 소주잔이 아니고 물잔이에요. 그 두껍게 생긴 찻잔이 있었네요. 거기다 소주 한잔씩 다 먹고 우동이 어찌도 그렇게도 맛있었을까 몰라요. 못잊어요 지금도.
노재명: 하하하하하하. 예.
성창순: 그래 먹고 그런, 그렇게 참, 참 못잊어요. 그래도 저는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할 때가 제일 행복했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성창순 명창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국악과 판소리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들을 많이 해오셨습니다.19>
(4) 판소리·전통춤 명인 성희경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3798
1996.10.24.16:00~18:30.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 다방.
판소리·남도민요·전통춤 명인 성희경 증언 장면. 촬영:노재명.
성희경(본명:성진순)은 1936년 7월 23일(음력) 전남 광주 북동 38번지에서 아버지 성부일, 어머니 한이례 사이의 1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성희경 동생은 차례로 남동생 성길웅, 여동생 성정, 성광숙(인천 거주), 성정애이다. 성길웅 아들은 성수원이다.
성희경 부친 성부일의 사촌 여동생 성모씨(成某氏, 1915년 무렵 출생, 성희경 고모)는 가야금산조와 병창, 무용을 잘했고 그 딸이 가수 윤복희이다. 성희경의 모친 한이례는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는데 위로 언니 한복례, 아래로 여동생 한복초와 남동생 한일섭이 있었다.
성희경 외삼촌 한일섭은 호적, 아쟁, 고수로 이름을 떨친 명인이고 성희경 큰이모 한복례의 딸이 바로 명창 성창순이며 성창순의 부친이 성원목 명창이다.
성희경은 14세부터 국악에 입문하여 정광수 명창에게 약 2년 동안 춘향가 중 초입부터 <옥중상봉>을, 19세부터 약 3년 동안 공대일 명창에게 흥보가 토막소리를, 29세부터 약 3년 동안 김소희 명창에게 심청가 토막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성희경은 14세 때 3년 동안 박영구한테 무용, 시조, 양금 등을 배웠다. 성희경은 이매방 명인에게도 승무, 오고무 등의 무용을 사사했다.
성희경이 박영구에게 사사한 춤은 칼춤(검무), 살풀이, 소고춤이다. 그 학습 장소는 전라남도 광주 도청 옆 동네에 있던 박영구 학원이었다. 박영구는 입으로 무용을 지도했다.
박영구는 맨처음에 무용 기초를 지도해 주었는데 발디딤, 그리고 굿거리 장단에 오른손은 하늘 방향, 왼손은 땅쪽으로 향하는 춤사위를 가르쳤다.
성희경이 박영구 문하에서 칼춤을 익힐 때 양모씨, 이모씨, 성명 미상자, 이렇게 3명과 함께 배웠다. 박영구가 가르쳐 준 칼춤은 타령 7~8장단-굿거리-자진모리-휘모리-당악-굿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박영구 학원의 검무 복장은 저고리 옥색, 치마 남색, 전립 주황색, 쾌자 검은색, 허리띠 붉은색으로 되어 있었다. 칼은 장식이 거의 없고 소박했는데 칼날과 손잡이 경계는 소리가 나게 두겹으로 되어 있고 칼날 끝에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성희경은 살풀이의 경우 무용 기초가 다 습득된 후 그 걸 기초로 해서 본인 흥과 멋으로 추는 춤이라 한다. 박영구 문하 학습시 살풀이춤의 수건은 요즘 흔히 연희되는 것보다 짧았다. 성희경이 박영구한테 배운 소고춤은 춤을 추다가 자진모리로 여민다. 박영구는 성희경보다 50세 가량 연상이었다.
박영구는 시조창도 명창이었는데 성희경은 박영구에게 평시조를 사사했다. 그리고 성희경은 박영구 문하에서 양금 풍류 48장을 모두 익혔다.
성희경은 1948년 무렵에 조상선 명창이 이끌던 국극 단체에 입단하였고 그 후 14년 동안 삼성국극단, 김연수 창극단 등 여러 국악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성희경은 17세 때 여수 명창대회에서 1등(특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2등은 성창순 명창이었다 한다. 성희경과 성창순은 이종 사촌간이다.
성희경과 장영찬 명창은 1940년대 후반에 창극 단체에서 만나 1953년에 혼인하였고 슬하에 딸(1954년 생) 하나와 아들 장지현(1961년 생)을 두었다.
성희경 나이 18세 때 혼인한 것이고 19세 때 딸을 낳고 26세 때 아들을 낳은 것인데 딸은 일찍 죽고 아들은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서 살고 있다. 성희경 아들 장지현이 할아버지인 장판개 명창의 참봉 교지를 보관하고 있다.
성희경은 남편과 함께 부부가 모두 국악을 하면 가정사가 엉망이 될 것 같아 국악을 중도에 그만두고 가정 살림에만 전념했다.
1996년 10월 24일 성희경 증언에 의하면 장영찬 명창은 12년간 당뇨병을 앓다가 1972년 3월 21일(음력) 새벽 1시 서울 명륜동에서 작고하였다 한다. 1996년 11월 8일 성희경의 말에 따르면 장영찬은 1980년 무렵 3월 21일(음력) 별세하였다 한다.
그리고 성희경이 소장 릴테입 녹음으로 기획한 ‘장영찬 판소리 심청가/흥보가’ 음반(고수:김명환, 서울음반 SRCD-1372~1373, 2CD, 1971년 녹음, 1997년 제작) 해설서 19쪽 장영찬 약력에는 장영찬이 1981년 3월 22일 새벽 1시에 타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장영찬은 명륜동에 거주하기 전에는 화곡동에서 살았다. 장영찬 명창의 묘소는 전남 곡성군 옥과에 있다.
장영찬(본명:장주찬)은 1930년 6월 28일(음력)에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에서 태어났다.(전북 순창 출신이라는 설도 있고 이름이 장석원으로도 알려져 있음) 장영찬의 집안은 유서 깊은 국악 집안이다. 장영찬의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국악 명인이었으며 장영찬의 부친 장판개는 고종으로 부터 참봉직을 재수한 동편제의 거장이다. 장수향은 장판개 여동생이고 경주에서 제자 양성에 힘쓴 명창 장월중선은 장영찬과 사촌지간이다.
장영찬 명창은 13세부터 판소리를 공부하였다. 그 부친 되는 장판개 명창이 일찍 작고하여 부친에게는 판소리를 배우지 못했다. 장판개 명창이 47세 때 장영찬이 태어났고 그래서 장영찬 몸이 안좋다고 한다.
장영찬은 정응민(춘향가와 심청가), 임방울(적벽가와 수궁가 일부), 김여란(춘향가 일부), 조상선(창극), 박록주(흥보가)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장영찬 명창은 전남 광주 규봉암, 안양 삼막사(스승 박록주와 함께), 세검정(관음사 근방), 전남 진도읍 등지에서 판소리를 독공하였다.
조상선은 장영찬을 아들처럼 여겼다. 장영찬은 조상선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하면서 창극에 대한 안목이 생겼다 한다. 장영찬은 1941~1950년에 조상선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다.
장영찬은 1951~1956년 김연수 창극단 소속 시절에 임방울 문하에서 적벽가와 수궁가를 사사했다. 장영찬은 1957년에 박록주한테 흥보가를, 1959년에 김여란에게 춘향가를, 1961년에 보성 정응민 문하에서 춘향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장영찬 명창의 어머니 김옥란(1884∼1955년, 장국찬·장영찬 모친)은 순천 출신으로서 국악인은 아니었고 평범한 가정 주부였다. 장판개 명창과 그 부인 김옥란의 묘소는 전북 순창군 금과면에 있다. 장영찬은 배설향 명창과도 살았다.
장판개 명창은 일제 때 김명환 명고수와 함께 전남 곡성군 옥과의 이름난 갑부였다. 장영찬 명창의 위로 누나(1902년 생) 한 명과 형 장국찬(1926년 생)이 있었는데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현재 장영찬 명창의 사촌 남동생인 장재찬(1934년 생, 장영찬의 작은아버지 아들)이 수원에서 살고 있다.
장영찬은 박귀희와 의남매 사이로 친했으며 정철호와는 친구로 절친했다. 박귀희가 장영찬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장영찬이 소리 공부하러 갈 때 박귀희가 후원하고 장영찬이 소리를 배워 와 박귀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한다.
장영찬은 1962년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약 10년간 주연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 국악협회 주최로 열린 전국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20세 가량 연상인 선배 명창 김준섭(정응민의 수제자)과 실력을 겨루어 판소리 부문 대통령상을 받아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장영찬은 한참 명성을 날릴 무렵(1970년경) 병을 앓기 시작하여 녹음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 장영찬이 판소리 독창으로 남긴 음반은 없고, 다만 1971년에 릴테입으로 남긴 심청가와 흥보가의 일부 녹음이 있을 뿐이다.(고수:김명환) 이 장영찬 릴테입은 귀명창들 사이에 복사되어 애청되다가 1997년 노재명 주선으로 성희경 소장의 그 원본 테입이 음반화 되었다.(서울음반 SRCD-1372~1373, 2CD) 이 때 미처 음반화 되지 못한 장영찬·박초선·박봉선의 1970년 무렵 ‘춘향가’ 녹음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안향련과 김동애가 장영찬에게 약 2년 동안 판소리를 배웠다. 안향련은 춘향가와 심청가 전바탕을, 김동애는 춘향가 초입부터 <옥중상봉>, 심청가 토막소리를 장영찬한테 배웠다. 성희경도 한때 남편인 장영찬에게 춘향가 초입부터 <천자뒤풀이>까지 배웠다.
조영숙, 김일구, 임향님도 장영찬에게 판소리를 배운 바 있다. 임향님은 1973~1974년에 장영찬이 서울 창신동에 살 때 춘향가와 심청가를 사사했다.
김선초는 가야금병창 등 여러 국악에 두루 능한데 일본 오사카에서 국악학원을 하다가 노년에 몸이 아파 집에 주로 있다. 김선초 자녀는 미국과 일본에서 살고 있다.
성희경의 말에 의하면 목이 쉬면 오미자와 생강을 섞어 다려서 복용하면 목이 풀린다고 한다. 성희경은 1984년에 일본으로 이주하였고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활동하고 있다.(1996.10.24.16:00∼18:30, 1996.11.8.11:00~15:00, 서울 종로3가 다방, 서울 여의도 서울음반, 한국방송공사 KBS 별관 주변 식당과 찻집. 성희경 증언)20>
(5) 판소리 명창 신유경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02.11.14.12:50~15:00.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박송희 판소리 전수소.
판소리 명창 신유경 대담시 북가락 시범 장면. 촬영:노재명.
신유경은 1926년 음력 5월 12일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풍림리 359번지에서 부친 신윤덕과 모친 박백순 사이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고 화순에서 성장했다. 신유경 본명은 신금실이다.
모친 박백순이 화순 사람이다. 오빠 신평일은 판소리 명창이자 명고수로서 박기채·임방울한테 판소리를 사사했다. 신유경 말에 의하면 신평일은 임방울 성음에 가장 가까운 제자였다 한다. 신평일은 1922년에 태어났고 임춘앵 단체·국립극장에서 활동했으며 1994년에 작고했다. 신유경이 말년까지 신평일 사진을 몇 장 가지고 있었다.
신유경은 11세 때 첫 스승 박기채 문하에서 춘향가를 배웠다. 그리고 12세 때 임방울한테 단가를 익혔고 26~27세 때 김소희한테 춘향가를 사사했다. 28~29세 때는 박초월에게 수궁가를 공부했으며 30세 무렵에 김연수한테 춘향가를 배웠다.
또 김막동한테 능주에서 <승무>를 익혔고 김취란에게 가야금산조를 사사했다. 신유경은 10대 때 박송희와 함께 임방울 단체에서 활동했다.
박기채는 능주 사람, 판소리 명창으로서 김정문 제자라 한다. 박기채는 신유경 나이 11세 때 30여세였다. 박기채 아들이 목구성이 아주 좋은데 광주에서 식당을 하고 있으며 신유경이 노년에 조순애와 함께 만나곤 하였다.
단가 <때마참 봄이로다>는 박동실 명창이 작사, 작곡한 곡인데 이것을 김소희가 박동실한테 배웠고 그 후 신유경, 박송희가 김소희 문하에서 사사했다. 가야금병창 활동을 하는 위희경이 신유경한테 판소리를 공부했다 한다.
신유경은 심근경색증으로 노년에 다년간 세브란스병원을 출입하였다. 본 대담 후 다음날 신유경은 박송희와 함께 한국방송 KBS-FM에서 단가, 남도민요를 25분 가량 녹음하였다.(2002.11.14.12:50~15:00.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박송희 판소리 전수소, 인사동 음식점. 신유경 증언 내용, 대담·녹음 촬영·기록:노재명. 신유경 명창:2004년 별세)21>
(6) 무악 명인 조도화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4901
1998.3.14.15:00~20:00.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조도화 자택.
능주 씻김굿 고인 조도화 명인 살풀이 장고 연주 장면. 촬영:노재명.
조도화(曺桃花)의 본명은 조동운(曺東雲), 별명은 조박(曺博), 조두(曺頭)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충정공파(忠貞公派), 시조는 파주 태생의 조달승, 중시조는 조병승이다.
조도화는 1913년 음력 12월 9일(호적:1914년 9월 30일) 전남 화순군 능주면 한천리에서 부친 조정만(조병남)과 모친 오자근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도화의 조부 조상률은 능주의 유명한 고인이었고 조도화 나이 18세 무렵에 70여세 노인이었다. 1863년 생이고 악사, 줄타기 명인으로 한강에서 줄을 잘 탔다. 능성신청 도대방, 의관 벼슬을 했고 광산 김씨와 혼인하였다.
조상률 형제는 총 3형제인데 차례로 조상률, 조종률, 조상엽이다. 조종률은 조몽실의 부친이고 조상엽(조종엽·조떼깔·조때갈)은 당골 정모씨와 혼인하여 아들 조계남을 낳았다.
조도화의 부친 조정만은 호적상 이름이고 태평소에 능했는데 전문 국악인은 아니며 한의원을 경영하였고 한량이었다. 조정만은 49세에 작고했는데 조정만 작고시 조도화의 나이 18세 가량이었다.
조도화의 모친 오자근은 다름아닌 일제 때의 가야금병창 대명인 오태석의 고모이다. 오자근의 친오빠 아들이 오태석이고 오자근은 조도화 나이 51세 때인 1960년대에 80여세로 별세했다. 오자근은 글자를 몰랐으나 총기가 좋았다고 한다. 조도화의 고모는 광주 당골이고 조도화의 고모부 박태섭은 판소리·피리·징·장고 명인이다.
조도화의 친형 조동선은 판소리와 꽹과리에 능했으며 여동생 조봉례는 판소리 명창이다. 조동선은 1910년 무렵 태어나 1960년대 후반에 59세로 작고하였다. 조동선은 2~3년간 정응민한테 판소리를, 3~4년간 조몽실한테 판소리 춘향가와 흥보가를 사사했는데 조몽실제 흥보가가 장기였다. 조봉례는 온양 밑에 거주하고 있으며 딸이 슈퍼마켓을 운영한다.
조양금은 조도화의 형수로서 조도화와 동갑이며 산이(전문 국악인) 집안 출신이다. 조양금은 나주에서 함평으로 이주하였고 나중엔 능주에 거주하면서 무악 활동을 하였다.
조도화의 사촌형 오태석은 일제 때 대표적인 가야금병창 명인이었으며 오촌 당숙 조몽실 또한 일제 때 유명한 서편제 판소리 명창이었고 7촌형 조명수는 일제 때 명성을 떨친 가야금, 관악기 명인이었다.
조몽실은 능주에서 태어나 공창식한테 판소리를 배웠고 심청가가 장기였다. 조몽실은 현재 발탈, 창극계에서 맹활약 중인 조영숙의 부친, 조명수는 능주 태생으로서 판소리 명창 조순애의 부친이다. 조몽실은 원산에서 판소리 사범으로 활동한 바 있고 그래서 원산에서 조영숙이 거주한 바 있다. 조영숙은 조도화의 육촌 여동생이다.
조경환, 박기채, 김채만, 공창식 등도 조도화와 친인척간이다. 조경환은 조도화 친척인데 조도화 나이 20대 초반 때 80대 노인이었고 1950년 무렵 작고했다. 조경환은 판소리 명창으로서 김채만한테 소리를 배운 것 같다고 한다.
박기채는 판소리·가야금·양금 명인으로서 능성신청에서 연주를 한 바 있고 한주환은 능성신청에서 대금을 연주하였으며 한주환은 1906년 출생했다고 조도화는 말한다.(한주환 1904년 출생설이 유력)
박기채는 1912년 능주 잠정리 태생으로서 박대일 손자, 박동환 아들, 안사차 남편, 김종기(화순 출신)·정광수의 동서이다. 정광수는 안사차의 첫째 언니와 혼인하였고 김종기는 안사차의 둘째 언니와 혼인하였다.
박기채는 조도화의 공씨 처가쪽 친척이다. 박기채 부친 박동환은 가야금, 거문고 등 악기를 두루 잘했다. 박기채는 공창식·조몽실·정응민 문하에서 판소리를 사사했다.
안사차는 한천면 청계리에서 태어났고 능주 당골로 활동했는데 안기선·안채봉의 친척이고 박기채의 부인으로서 박기채보다 1세 연상이다. 안사차의 부친은 안창진(안창섭), 모친은 박창섭·박화섭의 누이이다. 안창진(안창섭)의 재취 부인 한모씨는 작고했는데 굿을 매우 잘했고 그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화순군 춘양면 가봉리 2구에 살고 있다.
김채만은 공창식의 매부이자 공창식의 판소리 스승이다. 김채만은 능주면 석고리(구름자리·궂인자리) 태생이다. 김채만 누나는 강진에서 여관을 했는데 1960년대 초~중반에 작고하였다. 김성권 부부는 예전에 당골 활동을 하였다 한다.
공창식은 조도화의 장인, 공기남과 공기준은 조도화의 처남이다. 공기남, 공기준은 판소리 명창 공대일(공옥진 부친)과 친척간이다. 공창식은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차례로 공기주, 공기남, 공기준, 공기관, 공기환이고 첫째딸은 공경례, 둘째딸은 공점례이다. 공경례는 1921년에 태어났고 조도화와 혼인하였으며 공점례는 1925년에 태어나 신안군 압해도에서 살았다.
공기주는 1890년대 초~중반에 태어났고 공기남은 1917년 생이며 공기준은 1918~1919년 무렵에 태어났고 공기관은 1920년 무렵 출생, 공기환은 1923년 무렵에 태어났다. 이 가운데 공기주, 공기관, 공기환은 국악을 하지 않았고 공기관과 공기환은 노년에 제주도에 거주하였다.
조도화의 주된 활동 지역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현재의 행정명)이었다. 지금은 면소재지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목사(牧師)가 있던 큰 마을로서 지금의 광주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조도화는 처음엔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무업을 거부하고 신식 학교 공부에 몰두했으며 그리하여 중학 공부까지 마치고 은행원이 되었다. 순천의 호남은행이 첫 부임지였고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거기서 1년쯤 근무하다가 광양의 광산금광의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가 순천기생조합 권번의 서기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그리하여 그는 그렇게 싫어했던 화류계와 숙명처럼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기생조합의 선생으로 있던 집안 어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한량 치고 소리 한대목과 고장북(소리북) 장단 못치는 이가 없던 시절인데다 권번에서 일하다 보니, 그리고 재주와 흥을 타고난 터이니 그 또한 북채를 자연스레 잡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그는 조상들의 업을 대물림하게 된다.
조도화의 소리북 스승은 이한량과 김막동이었고 인간문화재 김명환 명고가 한때 조도화 문하에서 북가락 가르침을 받은 바 있다. 조도화는 순천에서 남원 사람 이한량에게 북을 배웠다. 김막동은 조도화에게 중머리, 진양조, 중중머리 12박, 자진머리 24박, 휘머리 36박, 엇머리 순으로 가르쳐 주었다.
김막동은 능주면 잠정리 태생으로서 1970년대 초~중반에 작고하였으며 조도화보다 2세 연상이고 조동선과 동갑이다. 김막동은 얼굴이 못나 한을 풍류로 풀었다 한다. 김막동은 스승 없이 자기 재주로 풍류를 했고 주봉현이 소리북 치는 것을 보고 북가락을 익혔다.
김막동은 3형제 중 막내였는데 첫째 형은 김광동이고 둘째 형은 김복동이다. 김광동은 1890년대 후반 능주 태생으로서 피리, 대금 삼현, 시나위 명인이고 김복동은 1900년대 후반 능주 태생으로서 피리 명인이다.
조도화는 판소리를 자득했는데 소리북을 치다 보니 자연히 익히게 되었다. 조도화가 자득한 판소리는 단가 <편시춘>, 심청가 중 <봄이 가고 여름 가고> 등이다.
조도화는 순천권번에서 활동하다가 얼마 후 나와 독자적인 공연 단체를 꾸며 국내뿐 아니라 만주, 일본 등 인근 국가를 다니며 순회 공연 활동을 하였다.
조도화는 광복 전에 동일창극단에 입단하여 북, 장고 고수로 활동하였다. 당시 임방울, 박록주, 박초월, 유모씨(여성), 박귀희, 오태석 등과 함께 동일창극단에 있었다. 동일창극단 시절 극장과 일정 잡는 일을 ‘사케노리’라 했는데 이 일을 김주행이 주로 맡았다.
조도화가 일제 때부터 1950년대까지 창극 단체 등에서 함께 교류한 국악인은 이동백, 김채만,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유성준, 장판개, 장도순, 장한똑똑이, 정종근, 김정문, 정응민, 박동실, 조몽실, 박기채, 박지홍, 공창식, 공기남, 조동선, 임소향, 정남희, 오태석, 안기옥, 한주환, 박록주, 임방울, 김여란, 박초월, 정광수, 박귀희, 김소희, 조난옥, 조소옥, 김춘앵, 김연수, 조명수 등이다.
이동백은 풍채가 좋고 <새타령>을 잘했다. 한번은 이동백이 김막동의 북반주에 맞춰 공연을 하는데 북이 마음에 안들어서 소리를 하다가 “그만 들어가자 막동아!” 했다 한다.
조난옥은 정정렬, 송만갑, 김정문, 박록주한테 판소리를 배웠고 심청가가 장기였다. 조소옥은 이동백, 정정렬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조난옥, 조소옥은 사촌간으로서 조난옥은 조도화보다 3세 연하이고 조소옥은 조난옥보다 2세 연하이다. 조금옥도 조난옥, 조소옥 집안 사람인데 춘향가가 장기였다.
조도화의 말에 의하면 김소희는 순창, 김여란은 마산, 박록주는 경상도 당골 집안 출신이라 한다. 박지홍은 나주 사람으로서 대구권번에서 소리 사범으로 활동하다가 작고했다.
정종근은 진주 사람으로서 조도화보다 60여세 연상이다. 정종근은 한량이고 <승무>를 잘 추었으며 주봉현을 데리고 능주로 왔다. 주세성은 주봉현 집안 사람으로서 춤을 잘 추었는데 김막동한테 <승무>를 배웠다. 진주 이소희 부친은 이신양이다. 성차옥은 성우향 친척으로 화순에서 고인으로 활약하였다.
조도화가 주로 교류한 전라도 국악인들과 사용한 주요 변(은어)은 이러하다. 세습 국악인:산이 또는 동관(동간), 악사:고인, 백정:따귀, 얼굴:벤대(변대), 개:서구, 닭:춘이, 입:서삼집, 밥:서삼, 떡:실억, 쌀:새미, 코:흥대, 노인:망구, 눈:저울, 목구성:설주, 성기:뽁(남녀 구별 없이), 굿 계약금:행화돈(선불), 고기:사지것, 술:이탈, 기생:생짜, 양반:양짜, 그만두자:쉬 소남.
조도화는 시나위가 신을 위로하는 음악 ‘神臥爲’를 의미하고 판소리 분야의 단가는 내두름이라고 말하였다.
조떼깔은 1940년대 후반에 62~63세로 작고하였다. 조계남(조떼깔의 아들)과 조명수는 육촌간이고 조도화는 조계남의 조카뻘이다.
조도화는 30대부터 당골판의 고인(악사)으로 활동하였는데 조계남이 작고할 때까지 굿판에서 함께 장단을 맞췄다 한다. 조계남의 스승은 능주 사람 송씨와 홍씨였다 한다.
조계남은 한때 당골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굿판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해 장사를 했다 한다. 그러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고향으로 내려와 굿에 다시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본래 당골 집안이 아니었던 조계남의 부인은 시집 와서 책을 놓고 굿을 배웠다 한다. 조계남은 자식 교육에 온 정열을 쏟아 부인과 함께 밤낮을 안가리고 굿을 하여 네 아들을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그리고 70대에 들어서도 거의 매일 굿을 하였고 암 선고를 받고서도 입원할 때까지 굿판에서 피리를 놓지 않았다 한다. 조계남은 작고하기 얼마전 막내아들을 불러 놓고 대금을 불어 보게 하고 춤을 춰 보게 하였다 한다. 그리고는 이 일(무업)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취미로 배워 둬라 했다 한다. 이 대금 속에는 신선의 세계가 있으며 좋은 것이니 나중에 나이 들고 적적할 때 불면 좋을 것이라고 일렀다 한다.
조도화의 표현에 따르면 예전에 화순 지역엔 명인 명창(당골)들이 ‘꽉꽉 찼었다’ 한다. 허나 이제는 모두 세상을 떴거나 은둔, 아니면 서울로 가서 출세하여 인간문화재 국악인이 된 사람이 10여명 가량 되고 1998년 화순 지역에는 고작 능주 2명, 춘양 1명, 도암 1명, 한천 1명 모두 5명의 당골만이 남아있을 뿐이고 모두 80세 전후의 고령이며 그나마 무녀들은 이제 무업 활동을 기피하고 있는 추세이다.
조도화가 중년 이후 주로 함께 일한 무녀는 박정녀(조계남의 처/전남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204번지), 조양금(조도화의 형수/전남 화순군 능주면 석고리 27번지), 임장업(전남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 775번지)이라 한다.
한국방송(KBS-TV)에서 제작된 ‘한국의 미’ 능주 씻김굿은 1984년에 약 2일간 조도화 일행을 촬영, 방송한 것이다.
망자혼사굿의 경우 넋상자(넋당석)을 신랑 신부 각각 2개를 준비하는 원칙인데 신부의 넋상자는 색종이를 써서 화려하게 만들고 신랑의 것은 흰색으로 담백하게 만든다. 신랑과 신부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사모관대 원삼족도리를 입혀 산 사람처럼 혼례식을 치루고 신방까지 차려준 후에 씻겨서 왕생극락과 저승에서의 부부화락을 기원한다. 물에 빠져 죽은 경우에는 혼건지기를 해서 혼을 모셔다가 혼사굿을 해준다.
능주의 씻김굿의 절차는 총 12거리, 혼맞이굿-안당-본향-선부리-제석굿-고풀이-오구굿-씻김굿-길닦음-해원-종천맥이-사자풀이 순으로 진행되며 망자혼사굿의 경우에는 혼맞이굿과 안당 사이에 혼례식이 추가되어 행해지게 된다. 곽머리 굿을 능주에선 진씻김굿이라 하며 능주에서는 그밖에 경사굿(재수굿), 성주굿 등의 굿 종류가 있다. 능주 굿의 12거리의 세부 내용은 각각 이러하다.
혼맞이굿은 이승에서 극락왕생 못하는 망자의 넋을 씻겨 저승으로 천도하기 위해 혼을 받아 집으로(굿청으로) 모셔드리는 거리이다. 망자가 죽은 장소에 가서 맞는 것이 원칙이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일 때에는 그쪽 방향으로 나아가 정결한 곳을 택하여 하거나 삼거리에서 하며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대문 밖에서 동서남북에 절을 하여 넋을 불러들인다. 혼을 맞아 집으로 들일 때는 베를 문밖에 미리 깔아 놓고 맞이한다. 삼현육각이 연주하는 길군악 장단에 맞춰 굿상을 받쳐 지체하지 않고 들어온다. 혼맞이굿은 1시간 가량 소요된다.
혼례식은 대례상을 산사람과 똑같이 준비한다. 그리고 허수아비로 만든 신랑 신부가 하님의 부축을 받고 입장하여 집사의 홀기에 따라 산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혼례를 치른다. 혼례를 치르고 정갈히 마련된 신방으로 신랑 신부를 옮겨 새로 마련한 이부자리에 불을 끄고 신방을 차려 준다.
조왕굿은 조도화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 능주에서는 없는 속칭 ‘신식 나이롱굿’(비정통굿)이라 한다. 근래에는 간혹 하기는 하되 부정을 금하므로 교통사고, 총살, 자살, 익사 등 유혈악사한 망자일 경우에는 조왕굿을 생략한다고 한다.
안당은 안택 또는 선영굿이라고도 한다. 고조부 이하 4대 3대 조상님의 선영과 성주님에게 굿을 하게 된 내력을 고하며 많이 흠향하고 오늘 경사를 같이 축하해 달라고 축원한다. 시종 방안에서, 줄곧 살풀이 장단의 삼현육각 반주와 무가로 일관된다. 이 거리는 5-6분 가량 소요된다. 조도화의 증언에 따르면 삼현육각은 피리2(한쌍), 대금1, 해금1, 장고1, 북1 편성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본향은 흔히 문전굿이라 한다. 문은 그 집의 제일 큰 방의 문이다. 굿 세계에서는 대주가 거처하는 안방을 내당(內堂)이라 하여 안당이라 칭한다. 그러므로 문도 가장 중요한 문이 안당문이다. 물 한그릇과 술 한잔, 돈을 올린 본향상을 차려 놓고 망자가 방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전지왕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한 거리이다. 굿은 고인이 장고를 직접 치며 본향님이 오시는 노정기를 엇모리 장단에 읊고, 살풀이 장단으로 바꿔 고사덕담을 한다. 이 거리는 15~20분 가량 소요된다.
선부리는 흔히 조상굿이라고 한다. 집안에 모신 선영 조상님을 모두 청하여 대접하고 조상의 음덕으로 망자의 저승길을 잘 인도해 달라고 기원하는 거리이다. 조상을 모시고 위로할 때는 진양조와 자진모리에 맞춰 축원을 하고 지왕풀이로 끝을 맺는다. 선부리는 약 40분내지 1시간 가량 소요된다.
제석굿은 능주 굿뿐 아니라 타지역에서도 가장 중시되는 거리로서 중굿이라고도 한다. 중요도 만큼이나 2시간 이상 무척 길게 소요된다. 산 사람들을 위한 재수굿이라 할 수 있는 거리이다. 능주에서도 타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흰 장삼에 고깔을 쓴다. 말되에다 쌀을 가득 채우고 칠성불을 반드시 켜고 물을 한그릇 올려 놓는다. 제석본풀이를 시작으로 제석님이 오는 노정에서는 반드시 지신경, 명당경을 읽어야 하며 잡귀가 붙어 정신병이 생겼을 경우에는 축사경을, 신수굿에는 도액경을, 아이의 병에는 동자연명경, 원한에는 해원경, 백살경, 천지팔양경, 제왕경, 칠성경 등 각 상황에 적합하고 좋은 경들을 읽고 고사덕담 후에 소지를 올린다.
고풀이는 고를 풀어냄으로서 망자의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는 거리이다. 이때 쓰는 베는 대부분 20자 한필로 고를 만들며 베는 무명베, 마포, 명주베를 쓴다. 고를 맺을 때는 성주고와 망인고 사이에 쌀과 돈과 넋을 넣은 밥그릇을 수저와 함께 고풀이 베로 묶는다. 능주에서는 이 고풀이 때 장자풀이를 구송하기도 한다. 고풀이에서는 벼나 보리를 가마니나 섬가마니로 마당에 쌓아놓고 한다. 씻김굿이 아닐 경우에는 이 고풀이를 하지 않는다. 고풀이의 소요시간은 일정치 않은데 고가 풀리고 안풀리고에 따라 시간이 결정된다.
오구굿은 일명 바리데기굿 또는 버리데기굿이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망자에 대한 씻김의식으로 접어드는 거리이다. 먼저 누룩 한개를 놓고 쌀을 담은 밥그릇에 촛불과 향을 피워 꽂고 다래머리(가발)를 누룩 오른쪽 옆에 놓는다. 왼쪽에는 실꾸리(실을 그냥 감아 놓기도) 2개를 놓고 그 위에 큰 시루를 엎은 후에 시루의 구멍으로 하나씩 실을 빼내 장고의 조임줄에 묶어 놓는다. 그 다음 혼백상자를 시루 옆에 붙여놓고 베 한필을 풀어 시루와 혼백상자를 함께 감아 둔다. 그러면 사람의 머리 형상이 된다. 결혼 첫날밤에 깔았던 혼석을 펴놓고 망자가 평소에 좋아하던 형태의 옷, 양말, 손수건 등을 준비하여 혼석 위에 배열한다. 저고리 안에는 넋을 조심스럽게 넣고 노자돈도 넣어준다. 그 위에 창호지를 깐 키를 올려 놓고 쌀가루나 밀가루를 곱게 채로 친 후 창호지를 다시 덮는다. 그 다음 시루를 둘렀던 베로 덮고 신칼을 올려 놓은 다음 지전을 그 위에 놓는다. 그러면 사람의 형체가 완성된다. 이렇게 준비가 끝나면 바리데기를 부르면서 오구물림을 시작한다. 바리데기가 끝나면 고사염불을 부르면서 명줄을 뽑아낸다. 명줄이 다 뽑혀질 때쯤 징을 치며 키를 돌면서 망자의 환생 흔적을 밝혀 달라고 고사한다. 다 끝나면 창호지를 걷어내고 밀가루 위에 나타난 흔적의 모양을 보고 망자의 환생 모습을 가린다. 오구는 약 1시간 30분내지 2시간 가량 소요된다.
씻김굿은 모든 부정과 액과 원한을 쑥물, 향물, 맑은 물로 목욕을 시켜 풀어주는 거리이다. 영돈을 말아 솥뚜껑을 엎고 빗자루로 쓸어내며 씻어준다. 이 거리는 약 1시간내지 1시간 20분 가량 소요된다.
길닦음은 저승길을 밝혀주는 거리로서 베를 마당의 대문까지 늘어뜨려 길을 만들어준다. 이 거리는 약 40~50분 가량 소요된다.
해원-종천맥이는 액풀이라고도 한다. 사자풀이는 사자상(명태3, 국3, 밥3, 술3잔, 기타 음식)을 차려 놓고 망자를 데려가는 사자를 잘 대접하는 거리이다. 사자를 대접한 후 망자의 모든 소지품을 불사르는데 혼인한 사람은 집안에서, 미혼인 경우에는 대문 밖에서 태운다. 조도화의 증언에 따르면 사자풀이는 근래에 생긴 신행위이며 사신거리는 능주 굿에는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능주 굿에서 쓰이는 악기는 피리, 대금, 태평소, 해금, 단소, 징, 정주, 북, 장고이며 무구는 허수아비, 넋, 고깔, 넋상자(넋당석), 지전, 길베, 곳대 등이 사용된다. 넋당석은 당골들이 만들고 고인들이 만들기도 하는데 조도화는 못만든다고 하였다.
능주에서 미친 사람을 위한 굿은 헐렁굿이라 한다. 재수굿에서는 혼맞이굿 거리가 생략되고 곧바로 안당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능주 굿에서는 전 거리에 걸쳐 살풀이 장단이 두루 쓰이며(절반 이상) 그밖에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굿거리, 자진모리 등의 장단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굿 절차와 장단들, 반주 악기 음악에 대해서 조도화의 육성 증언과 시범 연주 장면이 취재 동영상으로 국악음반박물관에 기록 보존되어 있다.
조도화는 능주면에서만 굿을 하러 다녔다. 다른 지역으로 굿을 하러 가다가 걸리면 매 맞고 싸움이 났다고 한다. 본래 전통사회 능주에서는 당골이 굿을 한 후 남은 음식을 전부 가져가고 학습 수준에 따라 고인들에게 굿 사례금을 분배해 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광복, 6.25 후부터는 당골, 고인들이 모두 똑같이 굿 이익을 나누었다 한다.
조도화는 건강을 타고 났을 뿐아니라 물구나무서기, 등산, 요가 등으로 신체 관리를 매우 철저히 하여 고령에도 불구하고 노년에도 인근 마을의 왕래나 잔일은 모두 자전거를 직접 타고 다니며 해결하고 굿판의 일 또한 왕성하게 맡았으며 부부 성생활도 작고 전까지 계속하고 있다며 자신의 건강을 강조했다.
조도화는 일제 때의 판소리 대명창 공창식의 장녀 공경례와 혼인하여 슬하에 3남 4녀(모두 부산 거주)를 두었고 28년 전에 그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양분녀(1929년 출생)와 재혼하여 전남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187-1에서 함께 살았다. 조도화 자녀 7남매 중에 국악 하는 이는 없다.
조도화의 피리 가락, 판소리, 고법을 물려받은 이는 거의 없고 당골 박정녀의 막내아들(조웅석=조운식) 등이 그의 장고 가락을 배웠다.
조도화 명인은 삼현육각 피리, 장고, 북, 꽹과리, 판소리, 구음이 장기였다. 꽹과리와 장고를 홀로 동시에 연주하는 것이 가능했다. 능주 무악의 고형을 간직한 마지막 악사였으며 그가 보유한 판소리와 고법 또한 매우 중요한 기예였다. 화순 지역의 무속에 관한 것과 옛 명인 명창들에 대한 조도화의 증언 또한 매우 진귀한 육성자료라 할 수 있다.
하루바삐 능주 씻김굿이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혹은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예능이 대대손손 전승되길 기원한다. 조도화 명인은 2002년 별세하였다.(1998.3.14.15:00~20:00,1998.3.15.09:00~15:30.전남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187-1 조도화 자택과 그 근처 음식점. 증언:조도화, 보충 증언:조도화의 처 양분녀. 국악음반박물관/국립문화재연구소의 숨은 명인 명창 발굴 프로젝트 조도화 명인 편. 대담·녹음 촬영·기록:노재명)22>
= 계속 =
|
2014-06-3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