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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12년 6월 18일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국악방송 전주 중계 송신소 녹음실에서.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이성근 명고수 녹음 장면.
판소리 열사가 안중근전(소리·북:이성근, 박동실제, 김동준 사사) 모습.
이성근 설장고가락(이정범 사사) 장면.
이성근 명고수(우측)과 방송 진행자 노재명 대담 녹음 장면.
이성근 명고수 방송 녹음을 마치고 녹음실을 나오는 모습.
* 2012.6.18.13:00~17:00.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국악방송 전주 중계 송신소 녹음실에서 노재명이 이성근 명인을 인터뷰하고 2012.7.1.18:00~19:30.국악FM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진행:노재명)에 방송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2015년 4월 6일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http://hearkorea.com 명인실에 발표)
판소리 명고수 이성근 증언 내용
대담ㆍ채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안녕하십니까. 노재명입니다. 전세계 음악 중에서도 특히 한국 음악은 장단이 든든하게 받쳐줄 때 소리꾼이나 연주자가 마음껏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무대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지만 판소리의 중심을 지키는 역할, 바로 고수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9-1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 이성근 명인을 전주 국악방송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명인이 직접 경험했던 판소리의 역사, 이성근 명인의 삶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 나눠 보겠습니다. 이성근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성근: 예, 안녕하십니까.
노재명: 예, 건강이 어떠신가요?
이성근: 예, 건강이 지금에 와서는 조금 좋지를 않습니다. 제, 이 허리 디스크로 인해서 이 한쪽 다리가 좋지를 않애요. 그런데 이 좌측 다리가 더 안좋은 상황은 제가 6.25 직후 당시에 군대 가서 전투하다가 다리를 부상을 당해 갖고 골절 됐어요. 그래서 지금 현재 국가 유공잡니다.
노재명: 예, 실례지만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이성근: 예, 원래 본 나이는 지금 79세고 에, 호적상으로는 36년 생이니까 아마 76인가 77인가 모르겠네요.
노재명: 예, 그러면 고향 주소지는 정읍이라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이성근: 예, 정읍. 원래는 정읍군 산외면 용머리라는 데가 제 고향입니다.
노재명: 그 전라북도 정읍은 예로부터 풍물, 농악이라든지 국악이 굉장히 발달했던 곳이지요.
이성근: 그렇지요.
노재명: 그래서 아마 어렸을 때 선생님께서도 정월 대보름이라든지, 마을에서 농악이라든가, 굿 하는 장면을 많이 보셨을 거 같습니다.
이성근: 아, 많이 봤죠.
노재명: 부모님께서는 이런 국악 하시는 분은 아니셨나요?
이성근: 원래는 아니셨는데 인자 어머니가 그 때 당시에는 협률사라는 그런 단체가 있었는데 거기의 연극을 아마 한 거 같애요. 그 협률사라는 단체에 댕기다가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인제 만난 것 같애요. 그래 갖고 우리를 모다 거기에서 낳고 그래 그러다 보니까 아버지도 자연적으로 이 국악 쪽으로 물이 들은 것 같애요.
노재명: 그래서 모친께서 협률사의 창극 소리를 하셨구요.
이성근: 예, 예.
노재명: 부친께서는 모친 만나시면서 판소리 북도 치시고.
이성근: 예, 연극도 허시구.
노재명: 예, 연극도 하시구요.
이성근: 예.
노재명: 그리고 태평소도 잘 부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이성근: 예, 태평소를 잘 불으셨어요.
노재명: 예, 그러면 이성근 선생님께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가정 분위기로 해서 국악을 알게 되신 거네요.
이성근: 그렇지요. 예, 예. 인제 거기에 물은 들었었죠, 어렸을 적에. 인자 아버지, 어머니가 인자 저기를 하고 하니까 인제 동료분들이 집에 많이 왔다 갔다 하고. 예, 만일 집에서 인자 판소리를 또 허고 이러고 댕기니까 들은 것이 인자 귀에 젖어 갖고 인자 거기에 종사를 해볼라고 한 열 대여섯 살 먹어서 한번 시도하다가 아버지한테 혼났지요. 그러고 나서 인자 그 후로 내가 그냥 6.25 사변 직후, 후에 제대허고 나와 갖고 그 후로 전주에서 인자 소리 공부를 내가 본격적으로 시작허게 됐죠.
노재명: 그리고 이성근 선생님께서 형제간이 몇 남, 몇 녀신가요?
이성근: 지금 현재 형제뿐입니다.
노재명: 예, 동생 한분 지금 생존해 계시구요?
이성근: 예, 예.
노재명: 본래는 8남매시죠?
이성근: 예, 근데 그 때 당시는 홍역으로 죽고 뭘로 거시기해 가지고 솔직한 얘기가 6.25 사변 난 후로 굶주려서도 죽고 못먹어서.
노재명: 지금 생존해 계신 분은 동생 되시는 이종원 씨.
이성근: 본명은 이성옥.
노재명: 예, 현재 부산 무형문화재 제2호 수영 농청놀이의 태평소 예능보유자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태평소 명인으로 그 동생분이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태평소 잘 부셨던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습니다.
이성근: 예, 많이 받았지요. 인자 그것은 동생이 아무 것도 않고 그냥 한마디로 인제 나쁘게 얘기하면 건달 계통으로 돌을라고 어렸을 적에 그런 저기가 있어서 내가 농악단에 인자 생활할 적에 여성농악 인제 대닐 때 거기 끌고 데리고 대니면서 태평소를 내가 입으로 가리켰어요, 입으로. 새납 서도 지금은 이 플라스틱으로 저기 헌 거지만 옛날에는 갈대로 다 깎아서 했는데 그걸 내가 다 인제 아버지가 맨드는 걸 보고 고걸 내가 맨들어서 동생얼 줘 갖고 인자 “따아로리릿 띠루리 띠이띠디디이디~” 인자 이런 구음으로 이렇게 해 갖고 신민요 저기로 <닐니리야>, 뭐 <아리랑> 뭐 이런 거, 그런 걸로 인자 처음에 시도를 했죠. 그러다가 인자 여성농악단에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인자 태평소를 불게끄름 인자 잘 못불어도 인자 그 원래 농악단에 태평소가 있어야 하니까 그래야 아울리닝개. 그래서 인자 거기 데리고 대니면서 저기 하다가 인제 여성국악단의 저기 방태진 선생님, 우리나라 최고 이 태평소로 최고 명인 아닙니까? 그 냥반이.
노재명: 네, 충청도 분이신데 태평소 잘 부셨던 분이시죠.
이성근: 예, 예. 인자 그 양반한테 쨈매 줬지요. 그래 갖고 여성국악단의 그 냥반 따라다니면서는 같이 거기서 새납을 터득을 한 거죠.
노재명: 그러면 그 가족분들이 그렇게 음악성이 다 좋으셨나 봅니다.
이성근: 몰르죠. 인자 하하하, 본인들이 저기 해서 그런가 몰라도, 예.
노재명: 예, 아까 10대 때 국악에 호기심이 있어서 배워 볼라고 했더니 부친께서 혼내셨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그 반대를 무릅쓰고 국악을 계속 평생 하셨는데요, 그러면 몰래 나중엔 하셨겠네요?
이성근: 아, 그 뒤로 인자 내가 군대 있을 적에 아버지 돌아가셨고 제대하고 나와서 열흘 다 못되아 갖고 어머님 또 돌아가시고 그러고 나서 내가 인자 홀연, 동생하고 홀연 단신이 되었죠. 인제 그 바람에 인제 내가 이, 인자 기술 방면이나 뭔 다른 방면으로 한번 출전을 해볼라고 서울까지 올라가서 취직해 볼라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서울에서 취직하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더라고. 그 때만 해도 전라도 개땅새, 개땅새 해갖고 전라도 사람들은 서울에서 아주 알아주지도 않고. 그러니까 전라도 사람들이라고 하면 아주 치를 떠는 그런 정도가 되아 버렸으니까. 거기서 참 고생, 고생 많이 했죠. 서울에서 그 때 당시 동생이 전주서 있었고 에, 그래서 동생이 보고 싶고 그래서 전주로 내려와 갖고 여기 성당 골목 지내다가 그 때 여기 인자 국악원을 알게 된 거죠.
노재명: 예, 전주국악원이요.
이성근: 예, 예. 전주에 가 갖고 인자 시작을 했는데 전주 들어와서 그 남문 거리를 지내니까 아, 모다들 머리를 막 삼단 같이 기른 처녀들도 여기 많이 들랑거리고 또 젊은 아주머니들도 인자 쪽 지고 그냥 한복덜얼 입고 막 많이 들어갔다 나왔다 해쌌고. 그래서 거기 가서 보니까 거기서 소리를 배우고 소리를 또 선생님이 가리키고 계시더라고. 또 한량들이 또 그냥 이 방, 저 방 꽉 차 갖고 북들 쳐보고 모다들, 예.
노재명: 예.
이성근: 그래서 거기서 인자 내가 공부를 하게 되았는디 이제 낮에 가서 거기서 보고 인자 내가 밤으로, 밤으로 갈킬 적에 국악원에 이렇게 딱 들어가면 앞의 쪽 말고 뒤쪽으로 조그만한 마루가 요만하게 마루가 있었어요. 그래 본채가 마루가 있고 문이 쌍창문으로 이렇게 모다 이렇게 저기하고 덧문 닫고 하는 문이 있는디 인자 그 뒤에 가서 내가 인자 밤으로 댕기문서 한 며칠을 댕겼지요. 인제 며칠을 거기를 댕기면서 밤으로 가서 대니는데 그 때 당시 인제 그 단가들을 뭐를 가르쳤냐면은 그 때 <사철가>, 지금 <사철가>하고는 아주 딴 판이죠. 그 때 <사철가>하고 뭐, 뭐 “어화 청춘 소년님네~” 단가, 이런 거를 거기서 이렇게 구녕별로 가르치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 내가 그냥 듣고 인자 거기서 인자 나이가 어렸던데다 총기가 있으니까 앉잊어 버리고 그대로 인제 저기를 한 거야.
노재명: 예.
이성근: 그러다가 인제 들켰지 이제 거기서. 하하. 들켜 갖고 인제 어떤 늠이냐고 하면서 나를 딱 멱살을 잡고 들어, 들어가면서 이제 거, 거, 거시기 하는데 거기에 그 때 당시에 참 신발 쓸 만한 거 신고 다니는 냥반들은 다 도둑 맞았어요. 도둑 맞을 때, 인제 도둑놈이 요놈이 가져 갔는가 보다고, 하하. 아, 멱살을 잡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거요. 데리고 들어가길래, 나 도둑놈 아니라고, 나 상이군인이라고. 그래 “뭔 상이군인?” 그런데 신분증 비춰 주고 다 넘겨줬더니 “어? 아, 몇 살인데 벌써 군대를 갔다 왔냐”고. 아, 나 지원해 가지고 간 사람이라고. 그래 “어치게 하고 왔냐”고 해서, “나 이게 취미가 있어서 나 이걸 한번 허고 싶어서 뒤에 와서 지금 일주일째 와서 이거 듣고 있다.” 그랬드니 “아, 그래? 그런데 오, 오늘사 발견했네.” 그러면서 나보고 이걸 꼭 해보고 싶으냐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해보구는 싶은데 내가 기거할 데도 없고 먹고 살기도 곤란한 사람이고 그날 그날 참 얻어 먹다시피 이렇게 허고 댕기는 몸뎅이인데 어치케 공부를 허겠느냐”고 그랬드니, “꼭 헐 맘만 있으문은 공부를 시켜 주마.” 이거에요.
노재명: 예.
이성근: 아, 그래서 아, 헐 맘 있다고 그랬더니 그 국악원의 원장님이 그 때 당시에 이 전주, 저기를 허시는 문인이시고 김희순 씨라는 원장님이 계셨어요, 나이 많으신 분. 그 원장님한테 얘기를 해 갖고 “그럼 밥은 내가 멕여 줄 텡개 여기서 먹고 국악원, 말하자면 저기 청소도 허고 학원을 지키고 자고 니가 청소도 허고 전부 심부름 같은 거, 여기서 공부를 해봐라.” 그래 갖고서 인자 그 때부터 배우게 된 동기가 인자 그랬는디. 딱 붙잡혀가 갖고 “소리 한번 들어보자.” 그래서 “나 이 뒤에서 듣고 배운 놈 한번 해볼라요.” 그라고 긍개 장단도 안맞지 인자. 그냥 듣고만 배운 거라. 그라고 딱 했드니 “어?”
노재명: 하하하하하하.
이성근: “어디서 많이 해본 소리 같은디? 목이 아, 소리 허겄는디, 허겄는디.”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부터 인자 선생님이나 모다 여러분들이 많이 욕심을 내더라구요. “아, 목이 몇 년 한 사람보다 낫다”고. “아, 목이 참 좋다”고 하면서 그래 가지고 그래서 인자 공부를 허게 된 동기가 인자 그렇게 됐죠.
노재명: 예, 그 때 이성근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셨었나요?
이성근: 그 적에 내가 인자 내 본 나이로 그 때 스무살인가 될 거에요.
노재명: 예,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주국악원에서 국악을 배우기 시작하셨구요. 그러면 여기서 잠깐 무대라든지, 음반, 방송에서 선생님의 판소리 북가락을 판소리 공연 그런 형태로 감상을 할 수가 있었는데 오늘은 특별히 이성근 선생님의 판소리 고법 북가락만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이렇게 시범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성근: 예, 해보기는 해보겠습니다만 소리 없이 그냥 빈 북만 칠라문은 그 북이 지대로 되질 않애요. 그러니까 기본만 제가 해보겠습니다.
2012.6.18.13:00~17:00.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중계 송신소 녹음실에서. 이성근 설명·시범 판소리 기본 북가락 진양조 24박-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휘모리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전라북도 전주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이성근 명인 방송 편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20대 초반에 전주국악원에서 국악에 본격적으로 입문을 하셨는데요. 그 때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 김원술 선생님이라든지, 송영주 씨,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해주셨구요.
이성근: 예.
노재명: 또 다른 국악인들은 누구 누구 그 때 계셨나요?
이성근: 그 때는 인자 우리 동료들 가운데는 나중에사 인자 저기를 했지만 성창선이라고 그 사람이 있었고, 또 임성재라고 허는 분이 나보다 한 살 더 자셨는데 인제 그 분이 있었고 또 인자 유동기라고 있었어요 유동기. 이 우리 그 네 사람들 가운데 소리는 유동기가 소리를 잘했지요 제일. 또 선생님, 한 선생님 밑에서 오래 공부를 했고.
노재명: 어느 분 제자신가요?
이성근: 저 김동준 선생님 제자지요, 예. 인자 거그도 사실은 내가 끌어들였지. 그 사람이 그 다리 밑의 그 난장, 난장 트는 데서 소리 하는디 장단 없이 소리를 허는디 아이, 목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기가 맥히드라고 그래서 내가 선생님한테 가서 얘기를 했죠. “아이, 이만 저만해서 밑의 난장판에 갔드니 장단두 없이 기냥 무장단으루 소리를 허는디 별루, 한배는 별루 저기지 않고 근데 목이 참 좋은 학생이 한나 와 있드라”구. 그랬드니 나보구 “아, 그럼 니가 가서 데리구 와봐.” 그러더라구. 그래서 인자 내가 데리구 “야! 너 소리 공부허구 싶으냐?” 그렁개 “예, 저 허구 싶어요.” “그러문 너 나, 나 따라와봐.”
노재명: 하하하.
이성근: 하하하. 그래 인제 내가 국악원을 데리구 가서 그래 갖구 소리를 하기 시작해 갖구 우리 남자들 가운데는 제일 소리를 잘했지요. 근데 다 죽어 버리고 지금 나, 남자로선 나 하나 살아 버렸고. 인제 여자 동료들이 인자 많앴지요. 다 많앴는디 다 죽어 버리고 지금 최승희 씨 한분만 지금까지 이렇게 서로 상면하고 살고 있네요.
노재명: 예, 그 때 전주국악원 때서부터 지금 전북도립국악원이 됐는데요, 그 전북도립국악원에서두 같이 오랫동안 활동하셨구요.
이성근: 예.
노재명: 또 최승희 명창의 서편제 판소리가 굉장히 북가락 반주하기가 힘든 판소린데.
이성근: 아, 어렵죠.
노재명: 이성근 선생님께서 아주 단짝으로 이렇게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성근: 아, 많이 인제 오래 치니까. 오래 상면허고 오래 치닝개 북은 어쨌든 간에 장담 못하는 것이 북이고 이 소리허는 분들마다 다 가져 가는 개성이 틀리잖아요. 말 붙임새도 틀리고 같은, 똑같은 춘향가라도 한 선생님 밑에서 배왔는데 이 사람 틀리고 나 가져 가는 거 틀리고 저 사람 틀리고 그 기둥만 같으지 자기의 인자 목 성대 이길 저길로 가니까 그런 점이 인제 많이 틀리죠 이게.
노재명: 예, 그러면 여기서 잠깐 당시에 이성근 명인과 함께 전주국악원에서 공부를 함께 하셨고 또 오랜 시간 지금까지 이 전주 지역에서 판소리 활동을 같이 하고 계시는 최승희 명창, 현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신데요 말씀을 잠깐 들어보고 또 다음 순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최승희: 안녕하세요. 저는 전주 살고 있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2호 최승희라고 합니다. 이성근 씨 만난 것은 내가 처녀 때, 그 때가 열아홉살이던가 열여덟살이던가 그 때 만났어요. 이성근 씨도 김동준 선생님한테 공부를 했어요. 공부하면서 만났죠. 그 때가 젊어서 얼굴이 이뻤어요. 그래 가지고 여자들이 굉장히 따렀어. 어떻게 여자덜이 따르는지 이성근 씨를 보면은 여자들한테 따르게 해. 참 신발 끈이 끌러졌든가 운동화 끈이 끌러졌든가 하면은 자기가 가서 전부다, 다, 다 묶어 주구 아주 자상하게 그렇게 했어. 그러니까 여자들이 따르게 됐지. 이렇게 자상하게 해주고 그러니까. 이성근 씨 성격이 온화하고 이렇게 독하지를 못해. 독허질 못허고 남한테 그냥 뼈 아픈 소리나 큰 소릴 허들 안해. 그것이 장점이야. 도립국악원 교수로 이성근 씨가 나보다 조금 먼저 왔을 거요. 인제 연수생들이 이성근 씨허고 나허고는 부분 줄 알아. 나는 여기서 가르치고 이 방에서 가르치고 이성근 씨는 바로 복도 하나 그 앞에서 가르치고 인제 점심을 인자 집에서 싸 가지고 가 갖고 우리 방으로 갖구 와 같이 늘 먹고 장난도 징그럽게 많이 하고 그냥 그 우스개 소리도 많이 허고 잡담도 많이 허고 그렇게 허니까 자연히 정이 들어 가지고 굉장히 친한 친구가 돼 버렸어. 그러니 연수생덜이 3년 동안을 부분 줄 알고 그렇게 있다가. 그러니까 내가 별 짓 다허고 야 이놈아 뭣이 어쩌고 허고 막 장난허고 그런 장난도 다허고 그랬어. 그러니까 이성근 씨 부인도 다 알어. 다 알고 그러니까 굉장히 이성근 씨 마누라도 내가 상당히 좋아했어. 잘, 잘 서로 서로가. 이성근 씨! 나 최승흰데 국악방송국에서 일부러 나오셔 가지고 이성근 씨 얘기를 전부다, 다 해달라 그러는데 또 이성근 씨가 좋아헐 만한 소리를 한번 들려 주고 싶다고 그러는데 이 정정렬제 춘향가 넣는 것이 제일 낫지 않아? 그래서 내가 <방자 분부 듣고> 그거 소리 듣고 나한테 당장 전화 해. 전화 안하면 내가 쫓아 갈 거니까. 하하하하하. 그리고 아프지 말고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아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바라니까 꼭 건강하게 살아 주세요.
2012년 6월 18일 전라북도 전주 최승희 명창 자택에서. 최승희 자진모리 장단 소리, 정정렬제 춘향가 중 <방자 분부 듣고>(최승희 무릎 자장단) 일부 녹음.
노재명: 예, 이성근 명인이 젊었을 적에 함께 공부를 하셨고 또 오랫동안 전주 지역에서 같이 판소리 무대 생활을 같이 하신 최승희 명창의 이야기였습니다. 방금 최승희 명창 말씀 들어보니, 같이 단짝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시다 보니까 우스운 그런 오해도 많이 받으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이성근: 하하하. 너무 많이 받었지요. 너무 많이 받어. 지금도 그렇게 장난을 허고 지금도 누가 어디 가서 장난허고 저기 허면 둘이 부부간인 줄 알아요. 하하하하. 지금도 하하하하하.
노재명: 하하하, 예.
이성근: 그러니깐 따님, 따님들도 그냥 저기 거시기 허면 “여보” 어쩌고 허면은 “아부지, 아빠!” 하고 딸들도 그러고 그렇게 아주 그냥 참 친하게 그렇게 지금도 지냅니다.
노재명: 예.
이성근: 아이고 그러구 공부헐 적에도 친하게들 지냈지만 지금은 더 친하게 더 안헐래야 안헐 수가 없는 게 다 죽고 둘이밖에 안남았어요. 그 때 출신, 같이 공부했던 출신들.
노재명: 예, 이 최승희 명창께서는 판소리 학습 의욕이 많으셔 가지고 판소리 오바탕을 여러 명창분들한테 배우셨는데요. 또 이성근 선생님께서 동료인 최승희 명창한테 박봉술제 적벽가를 알려 주기도 하셨단 말씀 들었습니다.
이성근: 아, 알려주기는 뭐 알려줘요. 재주꾼이니까 허는 거 듣고 저기 허고 인제 녹음 저기 헌 거 이런 거 갖다가 인자 거시기 허는 거지 내가 직접 가르쳐 드린 거는 없어요.
노재명: 예, 그러면 대목 대목 이렇게 선생님이 알고 계신 것은 이렇다 말씀은 해주셨구요?
이성근: 예.(일부 기록물엔 최승희 명창이 이성근 명고수에게 박봉술제 적벽가를 익힌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근 최승희 명창과 이성근 명고수의 증언에 의하면 그러한 사사 관계가 서로 없다고 함)
노재명: 예, 이성근 선생님 말씀 중에 그 6.25 전쟁에 참전도 하셨다는 말씀 하셨구요. 또 그 때 다치셔 가지고 고생하신 말씀해 주셨는데요. 또 그 전에는 토벌대로 또 정읍에서 활동을 하셨구요. 그 토벌대, 또 6.25 전쟁 참전하신 그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성근: 그니까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토벌대를 들어갈 적에는 나이도 참 어렸죠. 본 나이로는 인자 열여덟인가 되았을 거요. 근데 나하고 의형제 맺은 형이 한분 있어요. 신태용 씨라고 그 형이 본래가 거기가 연락병으로 있었는데 그 중대장 성함이 신화춘 씨라고 그 분 밑에서 있었는데, 이 형이 거기 있다 고만 나올 무렵에 “너 여기서 이렇게 집에서 굶고 고생허지 말고 너 거기 별똥대 거기에 지원해서 가면은 너 먹는 건 배 불르게 먹고 또 고생 않고 저기 헐 팅깨 너 거기 가서 중대장님 연락병으로 가서 있어라.” 의형제 맺은 형이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사실은 인자 그 때 갈 적에는 배 고파서 갔죠 인자. 배가 고픙개, 하루 죽 한 그릇 먹기도 힘든 때니까. 그래서 인자 거기를 가서 있다가 거기 가서 한, 근 1년 근무했을 거에요 거기서.
노재명: 예.
이성근: 에, 그러구 있다가 8사단 토벌 작전이 정읍에 내려와 갖고 정읍 하천에다가 주둔허고 있었는데 하천으로 저 담양으로 이리 토벌 작전 끝마치고 다시 정읍으로 다시 왔었어요. 그러다가 아이고 나도 이왕 군대 들어왔응깨 나도 전투나 한번 허다가 죽드래도 전투나 한번 허고 그럴란다. 최전방으로 보내달라고 그래 갖고 최전방에 올라가 갖고 불과 한 3개월도 안되아서 전투가 벌어진 거에요. 그래 갖고 거기서 이 다리를 부상당해 갖고.
노재명: 아이고.
이성근: 그래서 그 때가 아마 최고 발악할 땔 거요. 아마 최고 발악.
노재명: 그 때가 6.25 막바지 고지 탈환 막 심할 때 투입이 되신 거 같습니다.
이성근: 아, 그 때 인자 1차, 1차 전진했다가 다시 후퇴했다 2차 전진허고 올라간 뒤에 가 갖고 방어선 쳐지면서 동부 전선 내가 있었는데 해금강 앞에 거기 가 있었는데 그 때 당시에는 막, 막 머리를 깎아 버려 갖고 밤에 전투 벌어지문 머리부터 만져 보는 거에요. 머리 깎았는가 안깎았는가. 머리를 깎았으문 무조건하고 대검으로 찔리는 거에요. 그래 갖고 밤에 육박전이 밤에 벌어지고 그래 갖고 우리 아군들 얼매나 많이 희생당허고 진짜 많이 저기 했지 동부 전선에서. 중부 전선, 동부 전선에서. 에, 그 거기서 부상당해서 인자 헬리콥타로 춘천 야전병원으로 나와 갖고 춘천 야전병원에서 한 3일 있다가 서울 3육군 병원으로 또 비행기로 또 후송. 후송해서 와 갖고 3육군 병원에서 또 며칠 있다가 막, 막 아군 환자들이 밀어닥치는지 학교 운동장에다 막 저기를 허고 천막 치고 거기다 거시기 했으니까. 그러니까 인자 우리는 또 인자 대구 27육군 병원으로 후송해 버려요. 그 대구 27육군 병원으로 가서 있다가 이제 제대하고 나온 거요.
노재명: 그렇게 전우도 많이 그 때 돌아가시고 또 본인도 이렇게 많이 다치셨는데 국가 유공자로 뒤늦게 인정을 받으셨지만 왜 그 국가 유공자 신청을 늦게 하셨나요?
이성근: 인자 몰라서도 못했고 첫째는. 나중에 인자 알고 나서 그거를 헐라고 이 서류를 준비를 허다 보니까 이 서류가 보통 서류가 많은 게 아니에요. 경장히 어렵드라구요. 그런데다 솔직한 얘기가 내가 아, 계우 초등학교 나올똥 말똥했는디 뭐를 알아야지. 아이고 그래서 그 때 당시에 하루 한 끼니 먹고 살기가 어려운 땐디 그 때 이미 나는 자녀들도 있고. 그러문 서울 한번 올라갔다 오는 경비 가지문은 우리 자녀들 데리고 국수라도 사서 다문 이틀이라도 먹을 수 있는 돈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것 따문에도 인자 사실은 못했던 거죠.
노재명: 그러면 선생님 말씀처럼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들어서 6.25 때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도 신청을 미처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으시겠네요.
이성근: 많죠 지금. 지금도 그 거시기를 몰라서 에, 지금 신청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드라구요.
노재명: 예,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애국자 여러분들, 국가를 위해서 고생하신 분들한테 국가가 알아서 나서서 그런 조사를 해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이성근 명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전주국악원 시절에 은사님 되는 김동준 명인 그 때 처음 만나신 거죠?
이성근: 네.
노재명: 그 김동준 명인께서는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로 활동을 하셨는데 본래는 판소리 명창이셨죠.
이성근: 그렇지요, 예. 참 소리를 이쁘게 기가 맥히게 잘했지요.
노재명: 그 분께서는 동초 김연수 명창 제자시구요.
이성근: 예, 중간에. 나중에사 그랬죠 나중에.
노재명: 그 전에는 어느 분한테 소리를 배우셨나요?
이성근: 박동실 선생, 이북으로 가신.
노재명: 아, 이북으로 가신 박동실 명창 제자 되시구요. 그러면 현재 그 김동준 명창한테 배우신 소리 중에서 기억나시는 것은, 춘향가는 지금 기억이 나시나요?
이성근: 춘향가는 기억이 나도 거, 인제 다 잊어버려 갖고 별로 인자 저기 허고 에, 심청가도 지금 요즘 저 서편제, 저 보성 바디허고 동초 선생 바디허고 심청가가 하도 그게 저기 해서 인제 귀가 쩔어져 갖고 우리 배웠던 심청가는 싹 지금 어디로 도망가 자꾸 뒤죽박죽돼 버리고 아마 그 심청가를 제대로 지금 그렇게 한 80프로, 90프로 헐 수 있는 사람은 경주에 있는 정순임 씨.
노재명: 예, 장월중선 씨 따님.
이성근: 장월중선 씨 따님. 거기서 인자 지대로 허는 거죠 지금 90프로, 한 80, 90 정도는. 인제 거기나 될까. 우리는 거진 다 뒤죽박죽돼서 잊어버려 갖고 보성제에서 나왔다가, 동초 선생 거도 나왔다가, 우리 선생 거도 나왔다가 이게 지금 뒤죽박죽되는 거요.
노재명: 예, 그리고 열사가는 이성근 선생님께서 김동준 선생님한테 배우신 그 소리를 음반으로도 취입해서 발표하신 바가 있는데요. 이 소리도 이북 가신 박동실 씨 소리지요?
이성근: 예, 예.
노재명: 일제시대 때 이런 그 독립적인 판소리가 불려졌다고 하는 것은 이 박동실 명창을 비롯해서 국악인들이 굉장히 독립 정신이 강하고.
이성근: 그러문요, 예.
노재명: 목숨 걸고 이 소리를 했던 거죠.
이성근: 네, 예. 그 때 당시 한승호 선생님, 김동준 선생님, 장월중선 씨, 모다 이런 거 선생님들이 공부를 했, 했다고 그래요. 했는디 유일하게 이제 여자분들은 유관순전 같은 거, 인자 관순전 요런 거를 주로 했지만 이준 열사나 안 의사나 윤봉길 의사는 남자들이 인제 주로 허는 소리니까. 결론에 가서는 그 열사가를 그 선생님한티 받어서 허신 분은 제가 알기로는 우리 김동준 선생님허고 한승호 씨뿐인 거 같애요.
노재명: 예.
이성근: 근디 내가 거 음반 저기 했을 적에 한승호, 그 선생님한테 “선생님! 나 이거 이러고 해서 여기가 좀 이게 위급해서 선생님한테 내가 공부하고 좀, 올라가서 공부를 좀 해야겄는데 이것 좀 가르쳐 주십쇼.” “야! 나 그거 다 잊어 버린지가 언젠지 아냐?” 다 잃어 버렸다 이거요. 흐하하하. 하나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 인자 그 음반 헐 즉에 그 선생님 모셔 갖고 서울에, “너 참 용허다. 그거 안잊어 버리고 너 어떻게 그거를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허고 있느냐?”
노재명: 하하하하.
이성근: 우리 동준이 선생님한테 공부해 갖고 내가 죽 신경 쓴 것이 이 열사가에다 신경을 썼었습니다, 다른 노래보담도. 그래서 이제 내가 이것은 안잊어 버렸어요. 그랬드니 칭찬을 허시드라고요.
노재명: 예, 그 열사가 가운데 저희가 이 현장에서 이성근 선생님의 소리와 자장단으로 안중근 열사께서 거사를 치루고 붙잡혀 가서 모친하고 사형 집행 전에 만나는 그런 장면까지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이성근: 예, 어쨌든 잘 못하더라도 하여튼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하하하.
노재명: 예, 부탁 드리겠습니다.
2012.6.18.13:00~17:00.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중계 송신소 녹음실에서. 판소리 열사가 안중근전(소리·북:이성근, 박동실제, 김동준 사사)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이성근 명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제 이성근 선생님께서는 국창이셨던 박록주 명창한테도 소리를 배우셨죠?
이성근: 네.
노재명: 그 박록주 명창한테 소리를 배우게 되신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이성근: 그 계기는 내가 전주국악원에서 공부를 헐 즉에 인제 박록주 선생님이, 인제 내가 어머님이라고 그랬지요. 어머니, 어머니 그러고 인자 부모빨이 되니까 다 부모빨이 되거등. 그런디 전주국악원에 인자 단체가 오문 꼭 전주국악원을 들리셔요. 그 때 올 때마다 오면은 단체 연구생들도 부족허고 인제 그렁깨로 그거 보강 좀 해볼라고, 해볼라고 오시는 것 같애요. 그래 갖고 와서 그 때만 해도 뭐 공부헐라고 그러지 단체를 갈라고 허는 사람이 없죠. 그러고 또 부모들이 또 누가 거 딸들을 그런 데 내보낼라고 헐 거에요? 아이, 인자 오시문은 나를 그렇게 꼬셔요, 올 때마다. 박록주 씨 그 어머니 동생이.
노재명: 예, 박만호 씨요.
이성근: 박만호 씨가 자꾸 “야! 니 이놈아 소리 공부럴 국창한테 공부를 해야지 아무 데서나 공부해 갖고 니가 무슨 명창이 되겄냐? 니 우리 단체에 따러 가자, 너.” 그 양반이 목 우대가 참 좋거든요, 목 성음이. 그래 인자 경상도 분이지만 그래감서 자꾸 그렇게 몇 번, 몇 년, 한 3년을 그렇게 날 꼬셨어. 결론에는 내가 인자 하하하하. 모다들, 다른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고 저기 허고 허니까 그리 기울어지드라구요. 그래서 선생님도 모르게 그냥 도망갔어. 그래 갖고 단체에 가서 댕기면서 인자 저기를 허는데 공부도 허도 못허고 고생은 고생대로 허고.
노재명: 그리고 그 박록주 명창한테도 그렇게 판소리 흥보가, 단가를 배우셨고 또 임방울 명창하고도 교류가 있으셨죠?
이성근: 예. 그 양반하고는 교류는 있었어도 공부는 내가 직접 안했지요, 그 양반한테는. 소리 공부는 않고 인자 그 어른들이 한마디로 얘기해서 인자 이 명창대회라는 걸 맨들어 갖고 그 때만 해도 유료 공연이니까 돈 받고. 돈 받고 인제 극장에서도 허고 하다 못해 글 안하문 인자 저 창고 극장, 창고 큰 창고도 저기 해서 빌려 가지고 하고 포장 치고 인자. 그 때만 해도 임방울 선생님도 예전, 그전에 전주에서도 난장이라고 해 갖고 실험하고 소탕하고 이런, 그런 난장판이 벌어졌으문 거기에 꼭 명창대회를 붙여요. 근디 그래 갖고 그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같이 저기를 했죠. 왜냐하문 그 선생님들만 혼자만 두시간, 세시간 할 수가 없으니까. “자 너그들이 와서 앞의 앞소리 좀 해라.” 그래 동초 선생님한테 거시기 헐 적에도 그 때도 그랬고. 긍개 우리가 인제 앞에 시간 채우기 위해서 한 10분씩, 한 15분씩 소리들을 해. 한 몇 사람씩, 몇 사람이 했었죠.
노재명: 예, 그러니까 박록주 명창도 결과적으로 남녀 혼합 국극사에서 인연이 닿으신 거구요.
이성근: 예.
노재명: 임방울 명창도 국악 단체에서 이렇게 알게 되신 거구요.
이성근: 예, 예, 그러문요, 예.
노재명: 임방울 명창한테는 직접 배우신 적은 없지만 그 익히 <쑥대머리>는 많이 들으셔 가지고.
이성근: 아문요, 예. 그 양반 쟁기가 <쑥대머리>니까. 더늠으로는 안되지만 인자 재주는 그 양반 재주로 인자 더늠 부르지요.
노재명: 예, 그러면 그 임방울 명창께서 <쑥대머리> 아주 명창이셨는데요.
이성근: 예.
노재명: 그럼 여기서 잠깐 이성근 명인의 소리와 북 장단으로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 <쑥대머리>를 이 현장에서 좀, 이 자리에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이성근: 그게 안잊어 버리고 생각이 날라나는 모르겄습니다만 한번 해보겠습니다.
노재명: 예, 부탁 드리겠습니다.
2012.6.18.13:00~17:00.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중계 송신소 녹음실에서.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소리·북:이성근, 임방울제)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전라북도 전주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이성근 명인 방송 편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이성근 선생님께서는 판소리, 판소리 그 북가락 뿐만이 아니고 설장고, 이 농악 활동도 하셔 가지고 장고도 아주 잘 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성근: 아, 뭐 잘 치기는 뭘 잘 쳐요. 허, 그냥 들은 풍월이처럼 그냥 치는 거지요 뭐. 하하.
노재명: 이정범 선생님한테 설장고를 처음 배우셨다고 말씀하셨지요?
이성근: 예, 예.
노재명: 그리고 또 다른 분들한테 설장고 어느 분한테 배우셨나요?
이성근: 다른 분들한테는 인자 저 전사섭 씨, 그 다음에 인자 그, 또 인자 최막동 씨, 이런 분들한테 배웠죠 인자.
노재명: 그리고 김오채 씨한테도 배우셨구요.
이성근: 예, 김오채 씨한테는 인제 제일 마지막으로. 그 양반이 여성농악단에 댕길 적에 여기 전주 여그 여, 거시기 해서 와서 갈치면서 절에서 갈치지. 그 때 인제 내가 따라서 배웠죠.
노재명: 그러면 그 설장고도 그렇게 잘하셨는데 지금은 안하시고 작파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성근: 아하하, 그거는 한마디로 얘기해서 인자 소리에 대한 지장이 많죠. 그 임방울 선생님이 아까 말씀대로 그 농악을 난장판 실험허고 댕기는 데 와서 소리하고, 소리를 허시고 이럴 적에 인제 그 거기에서 농악얼 한번 끝장구를 따러서 쳐봤어요. 인제 쳐봤더니 임방울 선생님이 “너 소리허고 싶으냐, 너 농악 치고 싶으냐?” 그래서 “아, 소리해야죠.” 그랬더니 “그러면 너 그 장고 치워라. 너 그 소리해 갖고 거 허는 사람이 장고 치고 소리 못허는 것이다.” 그래 갖고 아하, 소리허는 사람은 이런 거 해서는 안되겄구나. “야! 너 생각해 봐라. 이 소리하는 사람 폐활량이 좋아야 하는디 장구 치구 몸 헤후헤후 막 숨 차 갖고 너 저기 해 갖고 그 폐활량이 나빠져 갖구 너 소리 못허는 거여. 긍개 두가지 중에 한가지로 저기 해라.” 그래서 그냥 때려쳐 버리고 인제 소리로 그 때 계속 그냥 밀고 나왔죠.
노재명: 그런데 여기서 잠깐 궁금한 것은 그 때 배우신, 이정범 선생님의 설장고가 아주 전설적인 그 명인이시고 그 가락이 아주 희귀해졌는데요. 그 이정범 선생님의 설장고 가락을 좀 기록 차원에서 부탁 드려봅니다.
이성근: 내 전공 저기가 아닝개. 그건 지금, 아 소리도 다 잊어버리고 했는데 그런 것이 남어 있겄어요? 하하하하하하하. 안나와. 어쨌든 잘 못하드래두 여하튼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하하하하.
노재명: 예, 부탁 드리겠습니다.
2012.6.18.13:00~17:00.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중계 송신소 녹음실에서. 이성근 설장고가락(이정범 사사) 녹음.
노재명: 예,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이성근 명인의 설장고가락 이 현장에서 잠깐 시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거의 몇 십년만에 이렇게 한번 해보시는 거죠? 지금.
이성근: 그렇죠, 예.
노재명: 임방울 명창의 권유로 인제 이 설장고는 일찍이 작파를 하셨구요. 오늘 몇 십년만에 이렇게 방송을 위해서 기록을 해주셨습니다. 박봉술 명창한테 판소리 적벽가를 배우셨죠?
이성근: 네, 내가 박록주 선생님 단체에 한 2년간 따러 댕기다가 그 때 당시에 박봉술 선생님을 우리 선생님이 모시고 금산사 그 희문암 절로 이, 여름 공부를 들어갔지. 그 때는 백일을 했어요. 그 때 박봉술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한테 열사가를 이어받고.
노재명: 예, 김동준 선생님한테요.
이성근: 예, 예. 우리 김동준 선생님은 적벽가 초앞은 하는디 그 밑에를 몰르세요. 근디 또 박봉술 선생님은 그 때 그 당시에 제가 얘기 듣는 견해로는 또 초앞을 못하셨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그거를 둘이 서로 그 뒤바꿈질을 허니라고 그 희문암 절에 들어가서 공부를 헐 적에, 그 적에 적벽가를 거기서 공부를 했지요.
노재명: 그러니까 그 박봉술 선생님하고 김동준 선생님하고 품앗이로 서로.
이성근: 예. 품앗이, 그렇지 품앗이 했지.
노재명: 소리를, 소리 품앗이라고 그러죠, 예. 그 때 백일 공부를 하셨는데 누구 누구, 그 때 같이 하신 분이 계신가요?
이성근: 에, 그 때 우리가 공부 들어갈 적에는 아까 말씀 드렸지만 임성재라고 허는 그 형허고 나하고 인제 박봉술 선생님 막내딸, 막내딸허고 우리 선생님 막내 여동생허고 또 우리 선생님 처제, 이렇게 해서 박봉술 씨 선생님 모시고 여섯 사람이 원래는 들어갔었죠.
노재명: 예.
이성근: 들어가 있었는데 그 후에 공기준 씨라고 허는 분이 거기를 들어왔고.
노재명: 공기남 선생님 동생이시구요.
이성근: 예, 그 때 당시에 그 양반들이 공부도 공부지만 피난처로 들어왔어요. 왜 피난처로 들어왔냐면은 잽혀면은 노무자나 국민병을 가니까. 그 때 아직 휴전이 안되았을 때니까, 예. 그래 노무자로, 아니면 국민병으로 붙들렸기 따문에 그거를 겸사 겸사해서 공부허러 들어오신 거에요.
노재명: 예, 그래서 백일 공부, 그 당시에 적벽가 한바탕을 다 배우셨구요?
이성근: 나는 그 때 당시에 끄테리 부분을 인자 우리 김동준 선생한티 이어 받었지요. 왜 그렇냐면은 나는 군대를 갔다 왔기 따문에 그냥 어디고 무사 통과를 허잖아요. 그러니까 심부름 댕기느라고 갔다 오면 벌써 이 만큼씩 가고 저 만큼씩. 근데 내가 인자 금산사에서 이렇게 내려오면 전주 오면 하룻밤 자고 가야잖아요. 이제 전주 와서 물건 뭐, 뭐 갖고 오라 하면은 전주 와서 인자 챙겨 갖고 가고 또 선생님 집에 거기 가서 또 뭘 또 갖고 오라면 집에 가서 갖고 오고 그니까 왔다 심부름 댕기고 저기 허고 허는 틈박으 적벽가가 한, 조금 끄트리 부분이 미진했죠. 그러고 또 선생님이, 박봉술 선생님이 술을 워낙 좋아하니까. 그 때 원평 가서 참 국악을 좋아하시고 예술인을 사랑하시는 분이 양조장을 하고 계셨어요. 이 양반이 술 생각만 나면은, 술이 없으면은 “야 순자야! 갈란다. 보따리 싸거라.” 하하하하하하.
노재명: 하하하하하.
이성근: 하하하. 그러면 우리 선생님이 “야 성근아! 얼른 가서 읍내 가서 술 갖고 오너라!” 그, 벌써 내려가면 내가 술 가질러 온 줄 알고 그 양조장 주인이 대두병 큰병에다가 묶어서 딱 저기 해갖고 담어 주면은 그 놈을 갖고 금산사 희문암까지 올라갈라문 상당히 멀어요. 예, 그걸 내가 왔다 갔다 하는 틈박으 공부를 내가 상당히 많이 미진을 했어요. 그것 따문에 나중에 우리 선생님이 서울 가 계실 적에 내가 그거 끄트리에 한 20분 소리, 그 때 거기 가서 마무리를 했죠, 서울 올라가서.
노재명: 예, 그 때 6.25 전쟁 와중에 백일 공부로 판소리 적벽가 알려주신 박봉술 명창께서는 훗날에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로 지정이 되신 그런 대명창이십니다.
이성근: 그렇지요, 예. 적벽가로는 막았죠. 적벽가로는 그 양반 같이 맛있게 하는 분이 없어요. 목이 그래서 그렇지, 진짜 소리 붙임새랄지, 그것이 말 새 놓고 거랄지, 거 저기 허는 거 보면은 참 그 목 갖고 소리 허시는 거 보면 참 탄복헐 정도에요.
노재명: 예, 국악인들 사이에서는 소리의 왕으로 그렇게 평가받으셨던 그런 명창이십니다.
이성근: 예, 예.
노재명: 또 그 무렵에 박봉술 명창한테 소리 배우시고 나서 전국 명창대회에 나가셔 가지고 큰 상을 받으셨죠?
이성근: 아이고, 큰 상은 뭐, 그 때, 그 때 당시는 인자 호남 명창대회라 해 갖구 심사위원이 신쾌동 씨.
노재명: 예, 거문고 명인 신쾌동 씨요.
이성근: 또 저기 동초 선생님, 김연수 씨.
노재명: 판소리 명창 김연수 씨.
이성근: 김소희 선생님 오셨었는가, 예.
노재명: 그 때 1등을 명창대회 때 하셨구요.
이성근: 예, 예.
노재명: 그래서 6.25 전까지는 선생님께서 가정에서 크게, 밥을 굶는다든가, 어려움이 많지가 않으셨구요?
이성근: 예, 예, 그렇지요.
노재명: 6.25 나서부터 이제.
이성근: 해방, 8.15 해방 직전까지는 그렇게 고통을 안당했어요, 우리가 먹고 사는 거는. 충분허게 넉넉허게 저기를 했고 남 밥 한 숟가락이라도 줘 감서 저기를 했는디, 해방 되고 나서 6.25 다음서부텀.
노재명: 예, 그 때부터 언제까지 고생을 그렇게 많이 하셨나요? 그 유랑 단체 활동하시고.
이성근: 많죠. 내가 군대 갔다 제대하고 나오들락까지 하여튼, 예. 가정적으로 여하튼 고생이 많았죠. 어머니, 아버지, 그니까 어머니, 아버지도 결국에는 인제 한마디로 그냥 못씨게 붙이면 제대로 뭘 못잡숴서 영향 실조로 돌아가셨다고 봐야죠.
노재명: 예. 그런 와중에 사모님 만나신 것은 몇 살 때 만나셔서 혼인하셨나요?
이성근: 내가 에, 스물한살 때 만났는가. 스물한살 때 알어 갖고 그 때 당시에 여수에서 남녀 혼합 국악단을, 이 국극단을 맨든다고 그래서 그 때에 인자 우리 선배분들, 선생님들이, 박봉술 선생님도 그 때 거기 계셨고 그래 인자 모다들 있는디. 그 창극단 댕기고 저기허고 헐 즉에 연극 대본이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 때, 그 때 쓰고 나면 없애 버리고 하는데 나는 그런 대본을 다 뫼아 갖고 있었거든요. 뫼아 갖고 댕기다 집에 갖다 놓고 갖다 놓고 했었는디 어떻게 알아 가지고 나보고 거 ‘울어라 새벽종’이라는 작품이 있는디, 아 그 작품을 좀 갖고 나보고 오라고 저기를 하네요. 그래서 아, 나 공부해야지 못간다고 하니깨 박봉술 선생님이 “야! 내가 공부 가리켜 줄께. 공부는 내가 시켜 줄 테니깨 그 대본 갖고 어여 올라와.”
노재명: 예, 하하하하.
이성근: 하하. 아, 선생님이 아, 명령을 내리는데 안갈 수 없잖아요.
노재명: 예.
이성근: 대 큰선생님이 명령을 내려. 그래서 그걸 갖고 여수 보광사 절로 올라갔었죠, 인자 찾어서. 거 가 있는디 나보고 또 “야! 이 여자놈들이 없다. 연구생들 좀 어서 좀 구헐 수 없냐?” “아, 연구생을 내가 어떻게 구해요?” 그렁깨 “야! 전주국악원에 없냐?” 그래서 “아이구, 선생님 제자들을 어떻게 내가 데리고 와요. 안돼요, 아이.” 그래 갖고 인자 연구생 구할라고 내려온 것도 아니고 그냥 그 핑계 잡어서 내려오면 인제 안갈라고 인제 안올라갈라고 대본만 주고 안올라갈려다, 공부를 할라고, 인자 안갈라고 했는데 아이, 그냥 난리를 치네요 그냥. 안온다고 막 그냥 박봉술 선생이 뭐라고 허시고 그냥 또 박봉술 선생님이 또 우리 선생님한테 연락을 해 갖고, “성근이가 좀 필요허닝깨 좀 보내줘.”
노재명: 하하하하하.
이성근: 그래 갖고 그냥 그 때 당시에 인자 전주국악원에 17, 18살씩 먹은 연구생들이 많앴어요. 모다들 “오빠 어디 가? 오빠 어디 가?” 그래서 “아, 나 여수에서 이만 저만해서 이런 선생님들허고 지금 단체를 조직허는데 거기서 자꾸 저기 싸는데 헐 수 없이 그 단체 갈란다.” 그러니까 “아, 오빠 나 좀 데리고 가. 나 좀 데리고 가.” 난리들이네. 아, 그래 갖고 내가 “아, 안되아. 선생님한테 혼나. 그니까 안돼. 안돼. 나중에라도 알면 선생님한테 맞어 죽응개 안된다.” 그러고는 기냥 모르게 살짝 그냥 도망갔는디 아, 한 며칠 지나고 나니까 모다들 가방을 짊어지고 이고 저기 허고 아, 여수 보광사 절을 그 산을 올라왔어. 아, 여그 보광사에서 연구생을 내려다 보니깨 뭔 여자덜이 보따리를 이고들 그렇게 가방들을 이고 올라오는데 보닝개로 아, 우리 전주 식구들이네.
노재명: 예.
이성근: 그래 그 때 당시는 여성국극단 뭐 초창기라 얼마나 대인기라, ‘햇님 달님’ 요런 거, 저기 했든지. 거기에 여자덜이 모다들 미쳐 갖고 사실은 그 여성국악단들 갈라고 그 짓들을 했었는디 우리 집사람도 한 사람 거기에 낑겨 있었어. 하하하. 그래서 여수에 올라왔는디 한 여름에 연습허고 뭣 허고 뭐 어쩌고 저기 허고 난개로 그래 갖고 내가 병이 났는디 그 전주에서 올라온 여자들 가운데 우리 집사람이 가장 먼저 나를 챙기더라구요. 아픙개 뭐 약도 이렇게 저기 해서 거기기 해주고 그 땀을 흘리고 저기 허고 나면 옷 같은 거, 난닝구 같은 거 벗어 놓으면은 갖다 빨어서 다 저기 해주고 으, 너무 고맙게 허는 바람에 내가 거기에 인자 넘어갔지. 흐하하하하하하하.
노재명: 하하하하하하.
이성근: 그래 갖고 인제 우리 집사람하고 결혼허게 되았죠.
노재명: 예, 그 단 두 분이 지금 전주에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자제분들도 같이 한 집에.
이성근: 아니, 막둥이가 살고 있죠 같이.
노재명: 예, 그러면 그 자제분 중에서 국악 하시는 분은.
이성근: 우리 막둥이.
노재명: 예, 막내, 그 이상호 씨요.
이성근: 예, 예.
노재명: 예, 유랑 단체 생활하시면서 자녀분들 키우시기가 무척 힘드셨을 거 같은데요.
이성근: 아이, 우리 집사람이 무지허게 고생했지요, 힘들고. 내가 인제 댕기니까 나 따라서 인자 애기 데리고 인자 저, 내 수발도 허고 저기 허게 허면서 따러도 댕겼고.
노재명: 예, 그리고 막내 아드님 이상호 씨는 이제 부친 맥을 이어서 판소리 고법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계시구요.
이성근: 긍개 우리 집사람은 지금도 뭣 허러 가를 갈켜 갖고 지금도 나한테 많이 원망을 지금도 해요, 지금도. 자기 대에서 끝내고 자기 고생하면서 그 만큼 저기 했으문 말지 뭣 허러 가를 입문시켜 갖고. 내가 많이 참 뭐라 허거든요. “안할라문 몰라도 헐라문 열심히 저기 허고, 알고 제대로 파고 들어야 한다.” 그래 갖고 막 인제, 인제는 지가 알어서 허니까. 나이도 인제 사십이 훨씬 넘어가 버렸고, 긍개 지가 알어서 헝깨 내가 간섭, 상관, 간섭은 안해요.
노재명: 예, 사모님께서 일평생 이성근 선생님 뒷바라지 하시고 여러 가지 이해도 많이 해주시고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요. 이 방송을 통해서 사모님한테 그 동안 고생했다, 고맙다, 그런 미처 못하신 말씀을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성근: 하아,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고생시킨 것은. 우리 집사람이 애들들 키우니라구 참 무지한 고생을 많이 했죠. 그닝까 고마운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래도 참 애들들 이렇게 못씨는 길로 안빠지고 그래도 다 깨끗허게 다 즈그들 갈 길로 다 가서 있고 예, 고마운 거는 이루 말할 수도 없죠. 죽어도 못잊죠 그거야. 근디 인제 가끔 가다가 오장 상하문 그냥 내가 좀. 흐하하하하하하하. 저기 한 때가 있는데 말은 못해도 내 속은 다 짐작은 있으니까. 내가 마누라 고생시키고 자녀들, 애들들 고생시킴서 우리 집사람이 참 키우니라 욕 봤다는 건 내가 자타가 내가 인정하니까. 하하하. 내 속으로는.
노재명: 예, 그렇게 중년까지 이성근 선생님께서 굉장히 유랑 단체 생활도 많이 하시고 고생을 하셨는데 1980년대 중반에 전라북도 도립국악단이 생기고 거기에 소속이 되고 활동하시면서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으시면서 고생을 좀 더신 것 같습니다.
이성근: 예, 하하하하하하.
노재명: 그래서 도립국악단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홍정택, 김유앵 명창 그 부부님들, 그리고 임산본 씨, 이일주, 최승희 명창, 그런 분들이 처음에 같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구요. 그리고 강도근 명창께 또 판소리를 배우셨죠?
이성근: 예, 흥보전 저 거시기에서 저 제비 다리 부러져 갖고 창공에 뜨는 데서 저 노정기로 저 뒤에로 고 쪽으로, 예.
노재명: 그렇게 판소리를 열심히 배우시고 판소리 명창 활동을 하시다가 판소리 고법 북가락 쪽으로 전환하신 때는 언제쯤이신가요?
이성근: 오십 중반일 거에요.
노재명: 고수로 이렇게 전환하신 어떤 계기는 혹시 있으셨나요?
이성근: 소리를 작파하고 북으로 돌린 거는 내 이 치아가 일찍이 파손됐어요. 그래서 위, 아래가 다 틀니가 되아 갖고 소리를 내가 해보니까 안되게 생겼고 그래서 미리 자포자기를 해버린 거죠.
노재명: 아이고, 아쉽네요. 그렇게 치아만 아니었어도.
이성근: 예, 미리 작파. 예, 그래 갖고 이렇게 소리를 허면은 이 입 천장이 쇠가 되아 놓으니까 미끄러져 갖고 그냥 휙휙 헛, 헛바람이 나가져 버리고. “이르으으으을~” 이렇게 밀으면은 휘익 그냥 휘익 이렇게 미끄러져. 그래 갖고 도저히 안돼 거시기 허고. 그래서 옛날에 박초월 선생님도 전주 와서 소리허실 즉에 이 틀니를 해 갖고 소리허다가 이빨 빠져 갖고 고 놈 소리허면서 앉어서 이렇게 줃어서 끼면서 소리럴 허셨거든. 그래 갖고 소리 끝 마치고 분장실에 들어가서 대성통곡을 허고 울으셨어, 박초월 선생님도. 그래서 내가 그런 걸 봤기 따문에 아이 이건 인제 더 이상 소리는 틀렸구나. 인제 북은 조금 치든 거시기니까. 얼른 내가 북으로 대비를 해버렸죠.
노재명: 예, 그렇게 치아 상태가 지금도 많이 좋지는 않으신데 오늘 특별히 저희가 부탁 드린 판소리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최선을 다해서 오늘 불러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성근: 아이고, 그게 소리가 제대로 된 소리가 아니요. 하하하하하. 헐 수 없이 과거에 했다는 그 저기를 허기 위해서 헌 거지.
노재명: 아, 그래도 오늘 아주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 됐다고 생각이 됩니다. 예, 그렇게 전라북도 도립국악단에서 활동도 하셨고 또 잠깐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셨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이성근: 예, 우리 선생님이 고인이 되시는 바람에 그 때만 해도 서울에 고법이 귀했어요, 북 치는 사람이. 그래 인자 내가 전국고수대회에 내가 1위로 대상을 받았거든요. 받았기 따문에 이제 서울에서 그 초청이 왔드라구요, 국립창극단에서. “자네네 선생님 돌아가시고 저기 하니까 자네가 그 뒤를 이어서 자네밖에 지금 서울로 올라올 사람이 없네. 그러니까 자네가 올라와서 저기를 허야겄네.” 그래 갖고 그 때 올라갔었죠. 올라가서 인제 저기 허고 있는데 아, 갑자기 또 인자 여기 전주에서 아, 홍정택 선생님이 연세가 많으시니까 퇴직을 해서 인제 나가셔야 한다고 이제 자리가 비어 갖고 있응깨 빨리 내려오라고 막 빨리 내려오라고. 그래서 헐 수 없이 그 때도 내려올 저기가 못됐는데 그냥 사표 써서 내놓고 나 몸 아퍼서 도저히 내 객지 생활은 못허겄다고. 예, 서울만 해도 객지 아닙니까, 전주에서. 그래서 못허겄다고 그냥 사표 써서 내놓고는 내려와 버렸죠. 그래 갖고 도립국악단, 도립국악원에 인자 홍 선생님 계시던 그 자리를 제가 앉게 됐죠.
노재명: 예, 1980년대 중반에 전북도립국악단에서 활동을 하시다가 김동준 명인, 그러니까 이성근 선생님의 스승 되시는 고법 인간문화재 김동준 명인 별세하신 다음에 그 자리에 국립창극단 거기에 고수로 활동을 하시다가 전북도립국악단의 홍정택 명창께서 자리에서 물러나시면서 그 자리에 이성근 선생님께서 초빙돼서 또 가셨습니다. 그러다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신 것은 언제입니까?
이성근: 92년돈가.
노재명: 예, 1992년도요. 그 때 소감이 어떠셨는지, 그 동안의 고생 이런 것도 많이 만감이 교차하셨을 거 같구요.
이성근: 그러니까 쩝, 내가 고생헌 보람이 여그서 나오는구나 허는 거는 속에 인제 느꼈지요. 그 동안에 내가 이 우리 국악계의 저기 허면서 고생했든 것이 그 보람이 여그 인자 나오는구나 허는 거를 느끼고 감회가 깊었죠.
노재명: 예, 이성근 선생님께서 그 동안 제자를 많이 양성을 하셨는데요. 대표적인 제자분들 누구 누구 계신지 소개 말씀을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성근: 예. 이상호, 정경춘, 또 저 신호수, 김종덕, 여 이 네 사람이 인제 대통령상얼 수상을 했고 그리고는 다 인자 그 전공자가 별로 없어요, 전주에.
노재명: 예, 평소에 그 제자분들한테 특별히 강조하시는 점, 판소리 고수로서 가장 중요한 점, 어떤 점인지 말씀 부탁 드립니다.
이성근: 가장 중요한 점은 인자 본인들이 열심히, 안할라문 몰라도 헐라문 열심히 해야 헐 것이며 에, 선생님덜 찾어 댕기문서 많이 소리를, 이 북을 모두 테이푸라도 구입을 해서 많이 듣고 저기를 해서 열심히 연구를 해야만이 큰 북이 된다. 에, 그리고 그 음각, 소리에 따라서 음각을 많이 연구를 하라고 내가 인자 강조를 하죠.
노재명: 예, 그러면 여기서 잠깐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이성근 명인의 제자 여러분들의 말씀을 듣고 다음 순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경찰서에서 근무하시는 김종덕 씨, 전원주택 개발업을 하시는 이희준 씨, 귀농하셔서 임실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임성래 씨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2012.6.18.13:00~17:00.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중계 송신소 녹음실에서. 이성근 명인의 제자 김종덕·이희준·임성래, 노재명 대담 녹음. 임성래 판소리 적벽가 중 <새타령>(이성근 명인을 위한 헌정곡) 일부 녹음 방송.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이성근 명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성근 선생님 올해 연세가 79세이신데요. 국악인으로서 일평생 활동하시면서 아, 그 때 내가 좀 아쉬웠다, 혹은 아주 행복했던 순간 한가지 회고 말씀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성근: 내가 인자 뿌듯헌 거는 인자 고생허고 나오다가도 우리 국악단이나 서울 국립창극단에 갔던, 그런 게 조금 뿌듯허고 내가 인제 이 단계까지 왔구나 허는 그것이 뿌듯허고. 인자 무형문화재를 받고 나니까 아이고 인자 국악계에 거의 내가 참 그 동안에 노력허고 열심히 살아 나온 것이 여기, 보람이 여기서 나오는구나를 그거를 이제 뿌듯허게 느끼지요.
노재명: 예, 마치 선생님의 인생살이가 판소리 적벽대전의 그 아주 큰 전쟁처럼 험난한 그 6.25 전쟁에서도 살아 나오셨고, 또 국악인의 일생이 참 순탄하지 않다고 그러는데 국악계에서 이렇게 팔십 평생 가까이 활동을 하시고 큰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아까 박봉술 명창한테 그 전쟁 와중에 막 심부름 해가면서 백일 공부를 산속에서 해가시면서 이렇게 적벽가를 배우셨는데요. 박봉술 명창의 소리제 적벽가 가운데 그 <새타령>이 마치 지금 이성근 선생님의, 전쟁을 한바탕 치룬 뒤의 그 분위기처럼 이 소리가 마치 그 이성근 선생님의 지금 상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 적벽가 가운데 <새타령>을 부탁을 드려볼까 합니다. 어떻게 가능하실까요?
이성근: 쩝, 예, 한번 해보겠습니다.
노재명: 예, 그러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2012.6.18.13:00~17:00.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중계 송신소 녹음실에서. 판소리 적벽가 중 <새타령>(소리:이성근, 북:김종덕, 박봉술 사사) 녹음.
노재명: 네, 박봉술제 적벽가 가운데 <새타령>을 이 방송 현장에서 이성근 명인께서 직접 불러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성근: 네, 감사합니다.
노재명: 이성근 선생님께서 한국의 파란만장한 그 20세기, 일제시대라든지 6.25 전쟁, 또 전통문화가 사라져 갈 때 선생님께서 온몸을 바치셔서 그 판소리 전통문화를 이렇게 지켜내셨구요. 또 가정을 훌륭하게 가꾸어 오셨고 국가에 큰 일을 많이 하셨는데요. 한평생 이렇게 살아오시면서 느끼신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젊은 사람들한테 좀 조언 말씀을 해주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이성근: 글쎄,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하하. 내 인제 생명을 걸고 해야죠. 내가 이것 아니면 죽는다 허면은 이걸 해야죠. 끝까지 열심히 아주 그냥 참 피땀을 흘려 가면서. 나도 인제 해야 되는 거지만은 나는 그런 게 그래요. 근로자들 서울 가서 저기 이렇게 그냥 대합실 같은 저런 데 가서 하이고 거기 추운디 그래서 굶고 저러는 걸 보면은 지금 같은 세상에 왜 그러고 사냐 그 말이에요. 뭐를 해서라도 목구녕 풀칠은 다 헐 수 있는데, 우리 같은 세상도 살았는데 진짜 우리 커 나갈 적에는요 하루 죽 한 끼니 먹기가 힘들었구 국수 한 그릇 먹기가 힘들었어요. 길에 가다가도 배 고프면 모다 밭에서 뭐 일하고 뭣 하고 그러면 거기 가서 조금씩 거들어 주면 거기서 하다 못해 고구마라도 캐면은 캐 주고 그러면 고구마라도 몇 개씩 이렇게 싸 주고 갖고 와서 집에 와서 그걸로 쩌 먹기도 허고 이렇게, 이렇게 안굶고 살았는데 왜 이 좋은 세상에서 어디 가서 아, 솔직한 얘기로 지금 봐봐요. 할머니들 하, 걸음도 지대로 못걷는 할머니들이 끌꾸르마 끌고 대니면서 거 폐지 줃어 갖고 거 연명허는 거 봐봐요. 그런 할머니들도 있는데 하, 그 요새 젊은 사람들 그렇게 사는 거 보면은 참 답답해.
노재명: 예, 아쉽게도 마칠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요. 앞으로 계획, 포부 말씀을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성근: 쩝, 인자 뭐 그, 하하하. 한마디로 얘기해서 인자 내 인생은 거의 다 인자 해 넘어가고 있는디 그 제자들 인자 본인들이 끝까지 다 나를 찾아와서 저기 헌다면은 내가 목숨 붙어있는 데까지는 참 도와줘야죠.
노재명: 예,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 됐습니다. 오늘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 이성근 명인과 함께 했는데요. 국악 명인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땅의 소리를 잇기 위해서 노력하셨던 이야기들, 그리고 그 흐름 가운데 이성근 명인이 귀한 소리를 이어온 과정들을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습니다. 명인의 삶 자체가 민족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한류 열풍을 타고 세계 시장을 개척해 나갈 젊은 국악인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는 그러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근 선생님 오늘 긴 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이성근: 감사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귀중허게 여기시고 들으신 분들은 우리 국악을 애끼는 분들이 주로 많이 듣습니다. 그러니까 민속 국악을 잘 들어주시고 잘 애용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노재명: 예,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전주 국악방송 녹음실에서 보내드린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명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2.6.18.13:00~17:00.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중계 송신소 녹음실에서. 판소리 수궁가 중 <고고천변>(소리·북:이성근, 임준옥 사사)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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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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