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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2001년 국악음반박물관/지구레코드에서 제작된 {판소리 3명창(최승희,성우향,박송희) 특별공연 실황} 음반(JCDS-0747, 1CD) 해설서에 실린 것이다.
판소리 명창 박송희 증언<1>
증언 일시/1995.8.31.15:00∼15:30, 1997.6.9.13:00∼15:00, 1998.7.7.14:30∼18:00, 1998.7.22.14:00∼18:00, 1998.7.27.17:50∼19:30, 1998.8.27.13:45∼15:00, 1999.3.22.20:00∼22:00, 2000.6.1.14:00∼19:00, 2000.6.2.16:30∼17:00, 2001.1.15.10:00∼10:20, 2001.1.17.13:20∼14:30.
증언 장소/서울 박송희 판소리 전수소와 그 근처 식당, 전화 통화, 한국방송공사(KBS) 본관,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
대담 정리/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나 박송희는 1927년 음력 7월 28일, 양력 10월 30일에 전남 화순군 화순면에서 부친 박종환(광주 사람)과 모친 선광주(광주 사람) 사이의 9남매 중 일곱번째로 태어났다. 나는 화순에서 태어나 어려서 가족이 광주로 이주하여 광주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내 위로 오빠 넷, 언니 둘, 아래로 남동생 둘이 있는데 둘째오빠 박춘섭은 인물이 잘 생겼고 정남옥씨 문하에서 가야금을 배웠는데 아주 오래전에 작고했다. 정남옥씨의 딸이 현재 생존해 있다.
나 박송희(朴松熙:세번째 예명)의 본명은 정자(貞子), 첫번째 예명은 농주(弄珠), 두번째 예명은 송이(松伊), 네번째 예명은 지희(智希)이다. 농주는 혼인 전 소리에 입문할 당시 아주 젊어서 쓴 이름이고 송이는 서정갑(박송희 남편)씨가, 송희는 김소희 선생님이 소개해준 채씨 한학자가, 지희는 박록주 선생님이 지어준 것이다.
나는 10대 때 성우향씨와 함께 성차옥 선생님한테 단가 <뒷동산>, <인호상이>, <죽장망혜>를 배웠다. 성우향씨의 큰아버지인 성차옥 선생님은 마른 체형으로서 여자 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피리를 잘 부는 화순 삼현육각의 명인이었고 성차옥 선생님의 둘째부인이 코 맹맹이 소리로 굿을 잘했다. 성차옥 선생님의 아들 성유성(일명 성구봉)씨는 정정렬씨에게 판소리를 사사했고 기가막히게 소리를 잘했으나 아편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성유성씨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단가 <홍문연>(천하태평)과 춘향가 중 <방자 나귀 안장 짓는 데>(늦은 중중모리)를 잘 불렀다.
나는 14∼15세에 1년간 박농월씨 등과 함께 전남 화순 박기홍(朴基洪) 선생님 문하에서 단가 <뒷동산>, <인호상이>, <만고강산>, 흥보가 중 <흥보 쫓겨나는 데>(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 집터 잡는 데>, 심청가 중 <망사대를 찾아가서>, 춘향가 중 <이별가>(춘향이 여짜오되 어머니 건넌방으로), <하루 가고> 등을 배웠다. 그 직후 박기홍 선생님은 대구로 가셨다. 당시 박기홍 선생님은 50∼60세 가량 되었는데 박기홍 선생님은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부친이 집안 사람을 양자로 보냈다. 박기홍 선생님은 전라도 광주 사람이지만 경상도에서 오래 살아서 경상도 말을 했다.
나는 15∼16세 때 정응민 선생님 문하에서 심청가 중 <화초타령>을 사사했으나 지금은 이때 배운 소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당시 정응민으로부터 익힌 <화초타령>은 현재 보성소리 명창들이 부르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르다. 내 생각에는 정응민제 보성소리는 장영찬씨가 가장 잘한 것 같다.
나는 16∼17세에 1년간 박농월, 성우향 씨 등과 함께 전남 화순 안기선 선생님 문하에서 단가 <편시춘>, <인호상이>, 흥보가 중 <흥보 쫓겨난 후 자탄하는 데> 등을 배웠다. 박농월(예명, 본명:박덕순)씨는 나보다 5세 가량 연상이다.
나는 17∼18세 때 박초선씨 등과 함께 광주 증슴사라는 절에서 김영준(본명, 예명:김억순) 선생님에게 적벽가 중 <동남풍 비는 데>∼<조자룡 활 쏘는 데> 등을 배웠다. 김영준 선생님은 <동남풍 비는 데>를 박봉술 선생님하고 사뭇 다르게 불렀고 김영준 선생님의 이 대목은 진양조-자진모리로 짜여져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거의 다 잊어버리고 지금은 생각이 안난다. 다만 내 나이 30대 때 탈춤꾼 허호영씨가 이 김영준 선생님제 적벽가를 녹음하자고 해서 시공관 분장실에서 김원길씨의 북반주에 맞춰 그 김영준 선생님제 <삼고초려>, <조자룡 활 쏘는 데>를 녹음한 적이 있을 뿐이다. 이 릴테입은 허호영씨가 생전에 가지고 있었다.
김영준 선생님은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고 키가 무척 컸으며 소리를 잘해서 임금한테 손을 잡히어 한때 손에 토시를 끼고 다녔다. 내가 이 김영준 선생님에게 소리를 배울 당시 김영준 선생님은 50대 후반의 나이였다. 나는 정확치는 않으나 김영준 선생님이 송만갑 선생님의 제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김영준 선생님의 딸이 김부용씨인지는 잘 모른다.
나는 17∼18세 때 광주 권번(당시 일본식 발음:겐반)에서 박영구 선생님에게 검무, 꽃춤, 승무, 가야금 풍류, 양금, 가곡, 가사, 시조를 사사했다. 예전에 영산회상 풍류음악은 정신병도 치유한다는 말이 있었다. 박영구 선생님은 당시 광주권번의 춤 선생으로 있었는데 발을 약간 절었으나 풍채가 아주 좋았으며 여러 춤과 악기에 두루 능했다. 이때 나는 박영구 선생님에게 살풀이춤은 배우지 않았으며 당시 박영구 선생님한테 사사한 시조를 가지고 광주 시조대회에 참가해서 2등을 했다.
내가 광주권번에서 학습한 검무는 남쾌자를 입고 빨간띠를 두르고 주릿대 치마를 입고서 추었고 장단은 염불-졸림-타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든 춤의 멋은 발 맵씨에 있다 하여 버선을 모양내서 매우 신경써서 신었다. 칼모양은 끝부분이 타원형으로 둥글게 휘어졌고 손잡이 맨끝부분에 색실이 줄줄이 달려있고 칼날과 손잡이 경계 지점에는 매끄럽게 돌출된 원형틀이 둥글게 둘러져 있었고 전체적인 칼 무게는 퍽 가벼웠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성씨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춘매(언니), 춘홍(여동생) 자매, 박수길씨와 함께 광주권번에서 박동실 선생님한테 판소리도 배웠다. 박동실 선생님은 당시 광주권번의 소리 선생으로 있었는데 내가 이때 박동실 선생님에게 배운 소리는 단가 <뒷동산>, <천하태평>, <진국명산>, <초한가>, 심청가 중 <범피중류>, 흥보가 중 <흥보 쫓겨난 후 자탄하는 데> 등이다. 이 광주권번에서는 언행, 몸 단장 등의 교육이 매우 엄격했다. 광주권번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는 졸업장을 받았다.
춘매, 춘홍 자매는 전라도 사람들인데 춘매는 조순애 정도의 나이이며 그 동생 춘홍은 언니 춘매보다 3살 가량 연하이다. 그 가운데 춘홍이 소리 재주가 뛰어나 박동실 선생님이 예뻐했다. 박수길씨는 박동실 선생님의 딸이고 전남 광주 사람으로서 박동실 선생님에게 소리를 배웠고 소리를 무척 잘했다. 박수길씨는 나보다 20여세 가까이 연상인데 일제 때 일찍 작고했다. 박수길씨 이후 그 집안에서 국악을 한 사람은 없다.(계속)
2001년5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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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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